1981년 겨울, 일등병의 이야기
졸병시절 허름한 막사에서 지친 몸에 아침마다 활기를 불어넣어 주던 음악이 있었다.
부드러운 여자가수의 목소리에 감칠 맛나는 노랫말,
작년 가을 어느 날 음악다방에서 여자친구와 들었음직한 감성적인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곤히 잠을 자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마치 나를 부르는 속삭임 같다.
노랫소리에 템포를 맞추면서 슬며시 눈을 뜬다.
공기가 다르다.
텅 빈 공간, 좌우로 살펴보니 두루두루 보이는 군용 침구들과 까까머리 남정네들이 곡소리를 하며 일어난다. "자! 기상.." 누군가가 휙 지나가면서 한마디를 던진다.
1981년 겨울, 기갑학교 교육을 마치고 갓 자대에 배치한 군기가 바짝 든 졸병시절 이야기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한경애의 《옛 시인의 노래》는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보내주던 기상나팔이었다.
1981년 15주의 기갑학교 교육을 마치고 낙엽이 떨어지던 10월에 자대배치를 받았다.
광주 상무대 기갑학교 조교였는데, 실제근무지는 인근 장성에 있는 전차포 사격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상 기분이 다운되는 가을, 부대는 험준한 산을 뒷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위병소를 들어서자 첫인상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커다란 바위산을 뒷배경으로 앞에 보이는 조그만 오두막집 같은 막사 2개, 조그만 연병장이 전부였다. 다른 시설들은 중간중간 키 큰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썰렁한 가을 분위기, 군기가 바짝 든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부대는 중대급으로 대대에서 멀리 떨어진 독립중대, 전차포 사격 연습을 해야 하기에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숨어든 것 같았다.
자대에서 며칠 있었는데, 갑자기 행정반에서 인사계가 부르더니 대대본부로 파견을 나가라는 것이었다.
연말에 무슨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내 인사기록카드에는 고등학교시절 밴드부를 잠시 했다는 기록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짝 군기가 들고, 파견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상태라 뭐를 들어볼 여지도 없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파견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대대본부에서 숙식을 하는 방식이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매일같이 연습을 했다. 두어 시간 연습하고, 쉬고, 다시 연습하고 근무도 없었다. 계급이 있었지만 그리 엄격하지는 않았다. 거의 자유의 몸으로 거의 연말까지 있었던 것 같다. 군에서 파견이라는 게 때로는 꿀맛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연습해야 할 것은 40여 명이 행진을 하면서 열병, 분열을 하는데 우리는 뒤에서 행진곡을 연주해 주는 정도였다. 악기는 고작해야 4~5가지로 무리의 한열 정도였고, 주로 발을 맞추는 것을 도와주는 타악기였는데 금관악기는 트롬본이 있었다. 트롬본은 고등학교 때 드럼본을 불렀다는 계급 높은 중사님이 있어서 차지하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심벌을 치는 사람이 되었다. 다행이었다. 사실 나는 토럼본은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기에 걱정을 했다. 어쨌든 졸병 시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세월이 지나가야 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행사 참가는 본부중대 병사들이 위주인데 몇 명 악기를 다루는 인력만 다른 중대에서 차출하는 정도였다.
차출인력이 몇 명 안 되기에 우리는 본부중대에서 같이 생활을 했다.
막사는 좀 허름했지만 넓고 큰 공간이었다.
당시 내무반은 양쪽에 나무로 된 침상(마루)이 있었고, 그 침상 위에서 가지런히 자던 시대였다.
내무반 분위기는 굉장히 따뜻하고 우호적이었다.
파견 나온 병사들에게는 간섭이 전혀 없었다.
연습하다가 지치면 쉬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졸병치고는 편안한 생활을 했다.
그 당시 그 연습을 주도하던 사람이 군종병이었다.
아마 사회에서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임 상병이었는데 연습이나 내무반 분위기는 전부 그 군종병이 주도했다.
아침이면 그분이 먼저 일어나서 항상 전축의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음악을 틀었다.
그 음악이 《옛 시인의 노래》노래였다.
"마른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우리들의 사이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요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좋은 날엔 시인의 눈빛 되어 시인의 가슴이 되어
아름다운 사연들을 태우고 또 태우고 태웠었네
루루루루 귓전에 맴도는 낮은 휘파람소리
시인은 시인은 노래 부른다 그 옛날의 사랑 얘기를 "
입대 전 너무나 많이 부르고, 듣던 노래라 이 음악을 듣는 순간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잠깐 잊는다.
첫 노랫말은 마치 그 당시 떨어지는 가을낙엽 속 졸병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른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입대 전 이 노래를 부르던 나를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너는 나는 노래 부른다. 입대 전 추억의 얘기를..."
어쩜 입대 전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나를 가다듬던 나지막한 나의 외침 같은 노래였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조그만 키에 머리숱이 조금 남아있던 그리고 누구에게나 웃어주던 군종병의 모습이 떠오른다.
음악은 세상에 색칠을 하는 것 같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었다 할지라도 그곳을 흐르는 음악이 있었다면 음악이라는 색상만 떠오를 뿐이다.
나의 1981년 가을은 《옛 시인의 노래》로 채색되었다.
제대 후 노래책을 펴고 이 노래를 기타 줄로 튕길 때면 편안하게 시작되던 아침이 떠오른다.
시대를 흘러도 명곡으로 인정되기에 여러 가수들이 새로운 해석을 한다.
그러나 한경애 가수가 부르는 그 분위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음악에는 그 음악을 들을 때 분위기와 나의 감성이 녹아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음악 이상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