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건대 앞 자취방에서 들었던 노래의 잔영
며칠 전 늦은 시간 TV채널을 돌리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방에 있던 아들을 불렀다.
TV에서는 대학가요제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학가요제를 잊고 있었는데 13년 만의 부활이라고 한다.
아들은 지난달 군에서 제대릉 하고 집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대학 휴학생이다.
아들과 공감대를 갖고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불렀는데, 아들은 5~6번째 출연자의 음악을 듣다가 별 감흥이 없었는지 EPL축구를 본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TV 채널을 돌렸다.
1977년에 시작한 대학가요제는 1980~1990년대 모든 젊은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서 대학을 간다"는 썰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 내 주위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70~80년대 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나 어떡해』,『내가』, 『꿈의 대화』, 『바다에 누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대에게』라는 노래들은 대 히트를 쳤고, 그 노래를 부른 가수들도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가수가 되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선함과 아마추어리즘이 가득했던 노래들은 한참 기타를 치던 동년배인 우리들의 감성코드와 같았다.
노래들은 일단 쉬운 코드여서 초보자들도 기타로 연주하기가 좋았다. 전주 부분은 초보자도 멋을 내기에는 아주 좋았다. 밴드들의 연주는 조금은 엉성하기도 했고, 몇 % 부족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게 매력이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기에 더 인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나 어떡해,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그대로 그렇게, 젊은 연인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꿈의 대화, 내가" 등 노래 제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신선하고 강력했다. 너무나 솔직했다. 가사의 내용과는 별개로 제목자체만으로도 노래는 우리들에게 상당히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그냥 일상에서 쓰는 말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과 사회라는 문턱 앞에서 방황을 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노래가사는 이별과 아쉬움을 말하지만 멜로디는 신났다. "어 이게 뭐지" 하는 신선함이 인기를 얻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이기도 했을 것이다.
1978년은 지금이 수능의 첫 번째 이름인 예비고사가 있던 시절이었다.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예비고사를 치르고 성적에 맞추어서 대학에 원서를 내야 한다. 그리고는 원서를 낸 대학에서 본고사를 치러야 한다. 본고사는 대학 자체적으로 치르는 시험이라 고등학교에서는 대학별 맞춤 강의를 해줄 수 없다. 그러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지원하려는 학생들은 대학별로 본고사를 대비해 주는 학원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예비고사를 마치자마자 상경을 했다.
나도 그중의 한 무리였다.
1978년 11월에 예비고사를 치르고 상경을 했다. 처음 간 서울은 모든 게 낯설었다. 일단 먹고 자는 게 힘들었다. 입시일정과 당락에 따라야 하기에 체류 기간을 정할 수가 없으니 하숙을 하든, 자취를 하든 기간을 정해서 방을 빌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미성년자가 여관을 이용할 수도 없는 일, 결국에는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친구의 하숙방과 자취방을 전전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서울은 참 이상했다.
돈을 주고 방을 빌렸으면 그 기간 동안은 누가 와서 자든 말든 방을 빌린 사람의 자유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주인은 일일이 오고 가는 사람을 체크하고 간섭을 했다. 연탄불을 신경 써주는 체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방안을 체크했다. 어쩌다 찬구네 방에서 신세를 져야 하는 경우는 아침 이른 시간이나 저녁 늦은 시간을 이용한 침입작전을 벌여야 했다. 주인의 눈에 띄지 않게 슬그머니 왔다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항상 좌불안석이고 불안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낯선 도시에서의 나날들 그때 유일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붙들어주는 것은 음악이었다.
낯선 서울이지만 제주 촌놈들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송들은 참 많았다.
당시 서귀포에서는 FM음악 방송이 없었고, mbc도 수신이 안 되었다. 방송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은 KBS였다. 서울을 가니 일단 하루 종일 음악이 나오는 FM방송이 있었다. 신기했다. mbc도 잘 들렸고, 소문으로만 듣던 tbc 동양방송도 잡음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밤을 잊은 그대에게』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심야방송도 들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신천지였다. 뒤돌아보면 아마 그때가 아마 제일 많이 풍성하게 갈증을 해소하듯 음악을 들었던 시기인 것 같다.
당시 어린이대공원에서 버스를 내리고 건대 정문으로 들어가는 기다란 진입로, 길 도로 양쪽에는 상가들이 즐비했다. 상가뒷면에는 하숙집, 자취방들이었다. 마침 친구 둘이 여기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건대에 원서를 낸 친구들이다. 대문을 들어서서 모퉁이를 돌면 친구의 자취방이 나오고, 입구에는 노출되어 있는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난방용이다. 때를 맞추어서 연탄을 갈아주지 않으면 방은 냉골이 된다. 이 친구들은 여기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생이 뒤바뀔뻔한 일도 있었다.
12월 추운 날, 친구들 몇 명이 모였다. 인근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일상이었다.
다들 학교에서는 공부를 한답시고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을 한 친구들이다. 더러는 원서를 낸 친구도 있었고, 더러는 학원을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뭔가는 외부에서 결정을 해줘야 하는 상황으로 모두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밖은 추운만치 방안은 따뜻했다. 방안의 온기에 몸을 의지한 체 서로가 별 다른 말 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왔다.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갈까 봐 볼륨을 낮추어놓은 상태라 전체적인 가사를 다 들을 수는 없었는데 딱 한 소절은 명확하게 내 귓가를 때렸다..
떠나간다면 난 정말 어찌하라고
떠나간다면 난 정말 울어버릴걸......
조용한 시작과는 달리 이윽고 터져 나오는 드럼소리와 부드러운 미성의 가삿말을 거쳐서
마지막에 반복되는 후렴 부분 중 "그대로 그렇게"는 전후사정을 모르는 체 훅 와닿았다.
"TBC 해변가요제에서 입상곡이죠... 휘버스가 부른 『그대로 그렇게』였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노래는 끝이 났는데, 노래의 뒤끝은 방안에 있던 우리 모두를 감전시키고도 남았다. 모두가 잠시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방안을 감쌌던 감흥이나 느낌은 아직도 가시지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원서를 접수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친구와 어디를 낼까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어울려 있었다.
원서를 낸 친구들은 "그대로 그렇게" (합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을 테고,
원서를 내지 않은 친구들은 원서를 냈다가 "그대로"가 아니고 다르게 결과가 나옴으로써
그들의 처지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태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그대로"가 좋을 수도 있다는 체념이나 방관의 생각들이 지배적이었다. 노래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콕 찔러주었다. 꼭꼭 숨겨놓은 비밀이 발각되었으니 멋쩍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서로를 보면서 씩 웃고는 이미 끝난 노래의 메아리를 좇았다.
그 추운 겨울, 불안해하던 시간들은 가고 이제는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씩은 이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는 가삿말처럼 그때 『그대로 그렇게』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반문을 해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