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찻집』을 듣고 있자니 생각나는 사람
추석연휴 안방을 뜨겁게 달군 가수가 있다. 국민가수라고 부르는 가왕 조용필이다.
70대 중반 나이에 150분 동안 30곡을 라이브를 했다고 난리다. 조용필의 노래는 긴 곡들이 많다. 노래도 쉬운 노래들이 없다. 스스로 가수의 왕인 가왕임을 입증했다.
80년대를 산 청춘으로서 조용필의 노래에 사연과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손을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짜 낭만 없이 운치 없이 산 사람이다. 가는 곳마다, 매체마다, 심지어는 길가뿐만 아니라 온 삼천리강산이 조용필의 노래로 뒤덮였던 시대다.
나에게도 조용필의 노래마다에는 크고 작은 사연과 추억들이 가득하다.
조용필은 내가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때『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로 등장했다. 한참 통기타에 심취해 있던 우리에게 이 노래의 경쾌한 리듬과 멜로디는 떼창을 하기에, 전주 부분은 통기타로 멋을 내기에는 아주 제격인 노래였기에 매일 악보를 끼고 살았다. 친구 집 골방의 추억이다.
조용필의 20개의 음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1980년 1집이다.
지금도 내 플레이 리스트에는 1번이다. 1집에는 이미 알려진 『창밖의 여자』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포함한 앨범에 수록된 11곡이 모두 히트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한오백년』과 『대전 부르스』조차도 새롭게 편곡해서 그의 가창력으로 소화시킴으로써 새로운 곡이 되었다고 느낄 정도다. 앨범 속 『정』, 『잊혀진 사랑』, 『사랑을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는 음악다방에서 나의 단골 신청곡이었다.
오늘 공연 중 『잊혀진 사랑』을 떼창 하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서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조용필의 노래는 듣기에는 좋지만 부르기에는 사실 쉬운 노래들은 아니다. 그러나 감성과 가창력을 가진 사람들이 노래자랑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노래다. 내가 한참 노래방과 단란주점을 다니던 시절, 강원도 아리랑, 여행을 떠나요, 그 겨울의 찻집 노래 정도는 분위기에 맞추어서 부르곤 했다.
2000년 즈음의 얘기를 꺼내고 싶다. 난 90년에 결혼을 하고 92년, 94년생 두 딸을 두고 있었다.
집안의 막내인 아내는 위로 언니가 있다. 둘의 나이 차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맏이와 막내라는 위치 때문에 그런지 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린 동생이 늘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기에 종종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다. 집안 살림을 챙겨주고, 어린 조카들과 노는 게 일상이었다. 외국에 잠시 떠나 있던 장모님을 대신해서다. 어린 두 딸도 항상 살갑게 대해주고 이것저것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챙겨주는 이쁜 이모를 곧잘 따랐다.
처형은 그리 크지 않는 키에 이쁜 외모, 배려심이 깊은 사람으로 주위 지인들이 모두 반기는 사람이었다.
시쳇말로 인기가 짱이 분이었다. 이런 분이니 가족인 조카에게는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집에 오는 날이면 집에서 식사를 하는 편은 드물었다. 조카들에게는 맛있는 특별식을, 동생에게는 부얶으로부터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외식을 추진했다. 그렇다고 처형이 요리를 못해서는 아니다. 처형은 한 때 식당을 했었고, 또 식당을 하는 주위분들에게는 요리법을 자문해 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셰프였다.
미식가인 처형은 맛집리스트를 항상 갖고 다닌다. 어디서든지 먹어보고 맛있는 곳은 다음에 조카들과 와야 할 곳으로 메모를 해둔다고 한다. 멋있고 분위기가 좋은 곳, 맛있는 곳이다. 돈가스가 맛있는 레스토랑, 냉면집, 갈빗집으로 애들이 선호도 1순위집들이다. 지금도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문득문득 처평과 같이 했던 곳을 지날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곤 한다. 그런 곳에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골라서 먹을 수 있으니 애들이 이모와의 추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맛집투어의 마지막은 노래방이다.
한참 노래방이 뜨던 시기라 동네 이곳저곳은 온통 노래방이었다. 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당시 S.E.S, 샵, 핑클 등 걸그룹 댄스곡들이 한참 인기를 얻던 시절이다. 내가 노래나 뮤직비디오를 CD로 구워주면 자매가 같이 흉내를 내면서 따라 하곤 했다. 노래방은 자매가 연습한 것을 가족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노래방에 입장을 하면 애들은 가수가 되고, 우리는 한참 동안 방청객이 돼야 한다. 애들의 무대가 끝나지 않을 기미가 보이면 아내가 강제종료를 시킨다. 처형도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애들에게는 잠시 쉬라고 얘기를 하고 처형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아니 아니, 나중에.."를 외치면서 손사래를 치던 처형이 슬며시 무대로 나간다.
외모와는 달리 중저음의 목소리, 가끔은 분위기를 타는 처형의 노래는 일품이다. 최진희의 『꼬마인형』이 18번이다.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를 곧잘 했다.
어느 날은 무대로 향하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다른 번호를 입력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잔잔한 전주가 흐르는데 모니터에는 조용필의 『상처』라고 떴다. 처형의 새로운 레퍼토리다. 그러나 멜로디는 이미 익숙했다. 우리는 흔히들 가사와 멜로디, 제목을 같이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노래도 나에게는 마찬가지였다.
"젖어 있는 두 눈 속에 감춰진 그 사연은
아직도 가슴에 아물지 않은 지난날의 옛 상처
바람이 잠들은 내 가슴에 외로움을 달래면서 기대어
상처 난 날개를 접어야 하는 외로운 사람아
당신은 내 사랑 영원한 내 사랑 외로워 마세요
이제는 내 품에서 다시 태어난 바람 속의 여자 "
무심한 듯 읊조리듯 때로는 절제하고 절규하면서 부르는 처형의 상처는 가사가사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픔이 묻어있는 듯했다. 그 후에도 처형의 상처는 몇 차례 더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수많이 들었던 처형의 노래 중 유독 이 노래에서 처형이 생각나는 이유는 모르겠다. 원래 처형은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는 자주 불렀다. 처형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노래다. 쓸쓸하면서도 혼자 읊조리듯 한 노래, 잔잔한 멜로디가 처형의 모습과 닮았다. 노랫말도 어쩌면 처형의 얘기인지도 모른다.
이제 처형의 노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니 못 들은 지 이미 십수 년이 지났다. 2013년 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20살이란 철없던 나이에 동네에서 결혼을 하고 바람 많은 세상살이를 했다고 한다. 아들 둘을 다 키우고, 결혼을 시켰다. 이제 남은 인생 보상받으며 잘 살 수 있는, 그리고 젊었을 때의 꿈을 하나하나 실현시키면서 살아가보리라 다짐을 하던 어느 해 가을 벼락같은 암이라는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울에 다시 진단을 받으러 갔다.
절망이라는 상처를 안고 돌아오는 날 공항 픽업을 나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병원으로 가야하는 길, 차 안에서 조용히 절규하던 처형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왜, 내가 이래야 되는데,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나지막하지만 세상을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뱉은 원망이었다.
착하게 살았는데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게 "이게 뭐야" 하는 배신에 대한 절규였다.
그리고는 살아보고자 노력했으나 세상은 처형을 더 이상 도와주지 못했다.
이쁘고, 배려심 깊은 처형은 그 겨울 우리 곁을 떠났다.
작년 겨울 우연히 찾았던 그 겨울의 찻집을 다시 가보지도 못하고 떠났다.
난 이젠, 『그 겨울의 찻집』이나 『상처』를 부르지 않는다.
단지, 조용히 그때를 생각하면서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오늘
조용필이 직접 부르는 『그 겨울의 찻집』을 듣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어서 추억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