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뜩 느낀 세월의 무상함은 사람을 회한에 젖게 한다. 과거를 생각케 한다. 추억이라는 그림에 당초에는 없던 색상을 입히게 된다.
요즘은 탑동해변공연장에 있는 제주문화원에 제주를 공부하러 다닌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날은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일종의 유유자적(?)함을 느껴보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 관덕정 정류장에 내려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제주 원도심의 중심이다.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가 있던 자리를 지난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국민학교(초등학교)인 제주북교를 지나서 탑동에 가까워질 때쯤이면 눈에 익은 건물이 보인다. 내가 결혼하고 우리 가족만이 처음으로 살던 집이다. 결혼 초기 추억과 낭만이 묻어있다. 내가 30년 동안 몸 담았던 회사 사택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본다. 외관의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파트의 색상과 이름이 그대로다. 군데군데 벗겨지고 있는 희미해진 페인트만이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알려준다. 옛날 생각이 났다.
"내가 30년전에 살았었는데.. 지금 정도면 무척이나 낡았을 텐데.. 사람이 살 수 있겠나? "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일주일 후 문화원을 가는 길 경로를 변경했다.
내가 살던 곳을 직접 보고 싶어서다. 정문에 들어서면 멀리 사택입구가 보인다.
입구에는 무슨 의미인지 커다란 돌 4~5개가 놓여있고,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다. 왠지 썰렁한 느낌이다.
돌을 우회해서 들어간 아파트에는 잡초와 수목이 휘늘어져서 길을 막는다.
인적이 끊긴 지 꽤 오래인 듯했다.
내가 살던 107호 현관문에는 언제 붙였는지 모를 각종 배달 안내문들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현관문은 제 가능을 상실한 지가 오랜 것 같다. 군데 군데 녹이 쓸었다. 거의 폐가 수준이다.
" 아~ 이제는 사람이 살지를 않는구나.." 이내 판단이 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1992년이 막 저물어 갈 때쯤.. 이곳으로의 이사는 직장에서 뜻하지 않은 발령 때문에 시작되었다.
시외지역에서 2년여 근무를 하다가 갑자기 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한 8개월여 근무를 할 때쯤 승진이 되더니만 생각지도 못했던 전산부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전산부는 unisys라는 대형 전산시스템에다가 COBOL 언어를 사용하는 전문부서였다. 기껏해야 PC정도를 좀 다룰 줄 아는 나로서는 아주 황당한 일이었다.
90년대 초 회사는 전사적으로 PC를 보급되면서 직원들의 사무기기 운용능력 향상을 위하여 사내 PC자격증제도를 운영했다. 매년 교육을 하고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주었다. 인사고과에도 반영을 했다. 자격증은 1,2,3급이 있었는데 전체 1,000여 명중에 1급은 없고, 2급을 가진 직원은 3명밖에 없었다. 그중에 한 명이 나였다. 나와 전산은 그 정도의 연관성 밖에 없는데.. 아마 인사권자들이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컴퓨터로 생각을 해서 발령을 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시간이었다. 어떻게 4년이란 세월을 견디고 나왔는지 새삼 나의 대단함에 칭찬을 해주고 싶을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첫째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때라 가정에서 시간이 많이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승진과 아빠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매일 걱정과 한숨이었다.
" 전산시스템은 고사하고 프로그래밍을 할 줄 모르는데 어떡하지.. 설마 실무를 맡기겠어? 아니 과 차석이니까 서무나 하면 되겠지.. 아니 그건 내 업무스타일이 아닌데.." 발령을 받고는 이런 생각의 반복이었다.
어느 날 당시 전산부에 있던 동창 녀석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떻허영 여기 오맨..." 첫 얘기가 친구도 발령이 의아하다는 듯 한소리를 한다.
"모르키여, 야! 거긴 어떻허느냐? " 답답한 마음에 통째로 뱉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는 매일매일 야근해야헌다, 낮에는 창구에서 민원을 처리허젠 허민 온라인이 살아있어야 하니까 할 일이 없고, 업무가 끝나서 온라인을 죽여야 데이터 백업하고 프로그램 테스트 허니까 매일 야근이여.. 서귀포에서 왔다 갔다 해지카? "
헉이다. 당시 제주와 서귀포를 오가는 버스는 10시가 막차다. 그 차를 못 타면 서귀포 집으로 갈 방법이 없다. 택시도 한두 번이지 매일 사용할 수는 없다.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야 할 판이다.
비몽사몽간에 눈치를 보면서 얼마를 버티고 있었다.
"사택에 방이 나왔는데 들어가 쿠과, 지금 들어가도 입주기간을 1년으로 칩니다" 92년 말쯤이다. 총무과 사택담당자의 전화가 왔다.
다행히도 당시 회사에서는 탑동에 직원용 사택이 있었다. 주로 육지에서 오는 직원들이 먼저 입주하고, 높은 사람들이 관사로 이용하고 있어서 일반 직원용은 몇 호 되지 않는다.
당시 회사에는 공채 1,2기로 입사한 나 또래 젊은 직원들이 많았다. 막 결혼을 할 시기이고, 임대료가 무료인 사택은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빈 곳이 없었다. 더욱이 제주는 이사철인 신구간인 1월이 아니면 이사를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때야 빈집이 나오고 대부분의 계약의 시작점이자 종점이기 때문이다.
인적이 끊기고 잡초만 무성하다. 좌측은 내가 드나들던 현관입구
사택 거주기간은 3년이었다. 지금 들어가면 올해도 입주기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2년 조금 넘는 기간 거주하는 게 된다. 그래서 명확히 해서 물어보는 거다.
" 네, 들어가쿠다. 언제 들어갈 수 있나요?"
" 지금. 비어 있으니까 아무 때나 들어갑써.."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내도 육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친정이 있는 제주시 쪽으로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도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에 별다른 고민이나 장애물은 없었다.
이런 기회도 사택관리부서에 미리 전화해서 읍소하고, 전산부 발령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윗사람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던 터라 갑자기 공실이 나오나 마자 전화를 준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이것저것 안 따지고 우리 가족은 산 넘어 제주시로 이사를 했다.
사택은 15평 정도의 오래된 건물 2개의 동이 있다. 구조는 지나치게 큰방하나, 너무 작은방 하나, 거실 겸 주방에 화장실이다. 발코니가 작은방의 2배 정도 되는 게 특징이다. 지은 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집의 전체적인 구조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 3명이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다. 입주자들이 대부분 내 또래로 직장 동료들이어서 어울리는 게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는 익숙한 얼굴들이어서 편하기도 했다.
우리 집 맞은편에는 내 발령동기가 살고 있었다. 남편들이 출근을 하면 또래 아내들은 서로 어울렸다. 자녀들도 비슷한 연령대라 자녀에 대한 보육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못 입는 옷들도 나눠주는 등 분위기는 좋았다.
직원들 사이도 좋은 편이었다. 집에서 아내들이 분위기를 잡으면 남편들은 할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더욱이 아이들이 맨날 같이 어울리고 좋아하니까 다른 집 아이들 이름까지 다 외울 정도였다. 가끔씩은 모여서 소주를 한잔 하기도 했다. 사택입주기간이 종료되어 다른데 이사를 가는 날은 모두가 울상이었다. 특히 친한 친구를 두었던 아이들은 더욱 그랬다.
나는 97. 1월 신구간까지 4년을 넘게 살았다. 중간에 사택보수작업이 있어서 다른 계단으로 옮겨서 살았다. 거주기간을 1년 더 연장해 주었다. 결혼 초창기 주머니가 가볍던 나에게는 크게 도움이 외었던 곳이다. 그래서 더 생각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탑동은 제주시의 메인이었다. 탑동은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대형 매립지이다. 대부분이 호텔과 상가이 들어서고 시민편의시설로 여의도광장과 비슷한 개념인 탑동 광장과 해변공연장이 들어섰다.
탑동의 명물은 95년 개관한 탑동 해변공연장이다. 대형 야외 공연장으로 바다를 등지고 서있다. 3000석 정도의 객석에 많으면 탁 트인 바닷가가 보인다. 멋있는 뷰때문인지, 개관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공연이 많았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열린 음악회를 직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방송국의 각종 공연프로그램이나 전문 공연들이 많아서 가족들과 종종 나들이를 하던 곳이다. 주말이면 슬슬 나와서 꼭 한 번은 거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제법 공연문화를 즐길 수 있던 기회였다. 한 번은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가수 인순이를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만나서 몇 마디를 주고받았던 기억도 난다.
사택은 위치적으로 중앙로와 칠성통, 지하상가와 제주목관아 등 원도심을 끼고 있어서 생활하는데 아주 편한 곳이었다. 퇴근하고 저녁을 끝낸시간 1시간여의 여유만으로도 원도심을 빙 둘러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이 젊은이들이 드나드는 최대의 핫플레이스였기에 이런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큰 활력소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안 좋은 추억도 있다. 가끔씩 상수도가 안 나와서 고생을 했던 기억,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까 현관문이 열리고, 장롱문이 열리고 집안이 쑥대밭이 됐던 기억도 있다. 집에 도둑이 든 것이다. 이날은 첫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돼지저금통이 털린 날이라고..
첫째가 엄마를 따라나섰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한바탕 난리부르스를 쳤던 기억도 있었다. 결국은 동네 구멍가에 에서 찾았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처음으로 집에서 PC통신을 하던 시기를 첫째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당시에는 집 전화선을 이용해서 PC통신을 하기 때문에 PC 통신과 전화는 동시에 할 수가 없다. 밤늦은 시간 조용하게 PC통신을 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전화를 한답시고 전화기를 들어버려서 PC통신이 끊기는 경우, 밖에서 전화를 했는데 몇 시간을 통화 중만 걸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되어 버렸다.
밤늦은 시간 PC통신을 하면 접속하는데 모뎀을 통해서 다이얼이 돌아가는 소리다 선명하다.
" 다다다 다닥, 삐이익..." 한밤중이라 소리도 요란하다. 그러면 애들은 아빠가 PC통신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HITEL 초장기 멤버로 ID는 첫째 이름이다.
그 후에 ADSL이라는 초고속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PC통신을 둘러싼 얘기는 라때가 되어 버렸다.
PC통신이나 인터넷의 시작도 전산부 시절이었다. 업무상 새로운 서비스가 나오면 전산으로 수용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접하기가 좋은 위치다. 인터넷은 지금과 같이 GUI 모드가 아닌 텍스트 방식으로 94년 말부터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어찌해서 타이핑을 하고 접속에 성공을 하고 듣도 보도 못하던 세계에 접하고 희열을 느꼈던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없다. 그렇게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인터넷을 접한 덕에 나중에는 회사에서 인터넷 접속이나 정보검색에 대한 강의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하고 산다. 자기가 살고 싶은 세상을 그린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하고 변수가 너무 많다. 내가 제대로 한다고 해서 나의 생각대로 진행되리라고 장담은 할 수 없다. 물론 근접하게 갈 수도 있기는 하다.
내가 전산파트로 발령을 받고, 사택으로 이사를 하고, 인터넷을 먼저 경험한 일은 내가 계획에 없는 일이다. 나의 사전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러기에 그걸 원인행위로 해서 발생하거나 이루어진 수많은 일들도 나의 사전계획에는 1도 없었다.
그러나 난 당시 발령지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그 분야의 사내 전문가로서 대내외 강의를 하고, 컨설팅도 하면서 근무를 하다 퇴직을 했다. 지금 프리랜서의 생활에도 당시 경험과 배움은 큰 자산이다. 나는 어디 가서 인사로 자기소개를 할 때 종종 이런 얘기를 한다.
" 할 수 없이 배웠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지금 프리랜서 생활을 한다고, 모두가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지금도 자녀들은 늘 공부하는 아빠로 인식을 한다. 지금도 버릇이 되어서 얼리어댑터로서 비교적 공부를 하는 편이다. 이것 역시 내 계획에는 없던 일이다. 전산부 시절부터 업무 때문에 집에서도 늘 관련 책을 보고 살았다. 그 모습이 애들에게 각인이 되어 있는 듯하다. 예전 사진을 보면 애들이 나 옆에서 공부를 하는 사진이 있다. 덕분에 애들도 책을 가까지 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의도치도 않았던 결과다.
계획에 없던 일이 발생하는 것이 나에게 불행만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뜻하지 않은 나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제대로 이용한다면 제3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도 되는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