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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Nov 01. 2022

팥빙수의 전설

 취향의 자리를 찾아서/ 대전 성심당

누구에게나 첫 '인생 음식'의 기억이 있다. 고향 대전에서의 음식을 예로 들면, 구두가게 매상이 좋았던 날 아빠가 사준 피자 헛의 파인애플 피자, 실크를 두른 듯 부드러웠던 롯데리아의 밀크셰이크에 이어, 성심당의 딸기빙수를 꼽을 수 있다. 


성심당은 고1 때 무용과 선배 누나를 통해 알게 되었다. 리바이스 청바지에 깔끔한 빈폴 셔츠, 누나는 딱 봐도 좀 사는 자제였다. 팥빙수를 대하는 익숙한 손길, 딸기와 팥을 섞지 않고 가볍게 떠먹는 모습은, 영국 귀족처럼 우아해 보였다.

반면 성심당이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던 나는 짝퉁 GEUSS 티셔츠를 입고 창피해하는 영화 <건축학 개론>의 승민 같은 아이(물론 얼굴은 제외하고). 당시 우리 집 생활 수준이 딱 그 정도였다.


서민적인 맛의 시장 빙수만 먹다가, 곱게 갈린 얼음, 딸기와 팥으로 세련된 비주얼을 뽐내던 성심당 딸기빙수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 맛난 걸 언제 또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싶어 빠르게 움직이는 숟가락을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이 붙잡고 늘어졌다. 돈은 없고 자존심만 남은 찌질이가 나였다.




다시 만난 딸기빙수는 예전 그대로였지만, 눈꽃빙수에 익숙해진 탓인지 그 시절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내가 이 정도 맛에 그리 흥분했었나?!' 식구들을 데려가 맛있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무안해졌다. 학창 시절 그렇게 맛있게 먹던 대패 삼겹살 집을 다시 찾았을 때의 실망감과 닮은 감정. 별로 나아진 것도 없는 살림 살인데 입맛만 비싸진 건가.


아이러니하게도 무안함 뒤에 찾아온 감정은 감사함이다. 성심당은 지금까지 이 맛을 지켜오고 있었구나. 눈꽃빙수 메뉴를 추가했지만 옛날 빙수를 포기하지 않았구나. 함께 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지켜내고 있었구나. 아무리 스페셜한 빙수가 나타나도 그 시절의 맛은 아니니까. 한 입 한 입 떠먹을 때마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철부지 고1의 내가 되어 웃고 있었다.


때마침 근처에 오픈한 '성심당 문화원'에서는 <연결:시간을 잇다 1955-2022> 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성심당의 과거와 현재가 창업주 부자의 구술 드로잉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단순히 유명한 빵집으로만 알고 있던 성심당이 추구해온 가치와 이념이 '수민문화'(한 달에 한번 주제를 정해 여는 서점)를 만들어 가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아빠의 어린 시절을 딸기빙수로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우리가 시간의 축적을 통해, 어느 한 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잼도시' 대전에서 방황하는 당신께 강력히 추천합니다.

성심당 딸기빙수로 시원하게 목을 적시고, 방금 나온 따끈한 튀김 소보로에 커피 한잔,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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