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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Oct 27. 2022

잘 살고 싶어서 시작합니다

22.10.17 (월)

프롤로그


"오빠, 나 드디어 나한테 딱 맞는 운동을 찾았어. 요기야 요기. 요기 요가가 하타요가라는 건데 말이지. 나한테 진짜 딱 맞는 거 같아. 할 땐 힘들긴 했는데 하고 나서 막 순환이 되는 것 같고. 선생님도 딱 내 스타일이고.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사람도 별로 없고, 암튼 여기 나랑 딱 맞아서 등록하려고."

"그래, 잘 맞는다니 다행이네. 얼마나 끊었는데."

"응 주 3일 끊으려다가 차담 시간에 선생님이랑 대화해보고 주 5일로 마음 바꿨어. 다른 데에 비해서 너무 싸. 좀 더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러다 임대료는 낼 수 있겠냐. 걱정했더니 괜찮으시데. 돈에 큰 욕심이 없으신 분인가 봐. 딱 내 스타일이야."


다행이다. 유방암에 복합성 우울증까지 해가 갈수록 아내의 병명이 추가되는 게 불쌍하고 미안하고 걱정됐는데, 흥분해서 달뜨게 말하는 모습만 봐도 기뻤다. 한 편 얼마나 좋았길래 저럴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진단만 안 받았을 뿐이지 겉으로 보면 내가 훨씬 더 몸이 안 좋다. 치질에, 전립선염, 신장결석,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고혈압까지, 거의 종합병원 수준으로 살고 있다. 한 번도 안 아픈 채로 잠자리에 들어 본 적이 없다.

며칠 전 팔을 베고 누운 딸이 물었다.


"아빠, 아빠는 재산이 얼마야?(요즘 로블록스에 빠진 딸은 돈과 게임의 상관관계를 깨닫고 있다.)"

"아빤 돈 없어. 이 집도, 가시리 집도 다 엄마 명의야. 아빠 건 저 레이(경차) 하나밖에 없어."

"이상하다 엄마가 아빠 1억 있다던데, 진짜 돈 없어?"

"수민이가 아빠 무시할까 봐 그렇게 말한 걸 꺼야. 그러니까 아빠 돈 없어도 무시하지 말아 다오."

"알았어 아빠, 돈 없어도 괜찮아. 대신 아빠 죽으면 재산은 다 나한테 주라. 꼭!"


편두통 때문에 경침을 베고 누워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중 딸의 마지막 말에 찌릿하고 근육이 뭉쳤다. '아, 내가 이렇게 살다 죽으면 우리 딸만 좋을 일 시키겠구나.' 물론 딸이 잘 산다면 좋겠지만, 죽기도 전에 그런 말을 들으니 왠지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빠 죽으면 재산은 다 나한테 주라. 꼭!


한 때 오토바이가 너무 타고 싶어서 노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럴 때면 아내는 "오빠가 타고 싶으면 타야지, 근데 오빠 나 신기 있는 거 알지? 저번에 꿈을 꿨는데 오빠가 오토바이 타다 죽는 걸 봤거든. 오빠가 너무 타고 싶으면 말리진 않겠지만, 내가 좀 기가 쌔잖아." 그렇다 아내는 기가 쌔다. 기가 쌔서 남편을 쥐 잡듯 잡거나 하는 게 아니고 굉장히 지능적으로 조종한다. 어찌 보면 일종의 가스 라이팅 같기도 한데 한 번도 그 말이 틀린 적이 없어서 너무 무섭다. 이럴 때 보면 수민이는 엄마를 닮았다. 아빠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것 같지만 정신이 번쩍 들어 똑바로 살게 만든다.


"나도 등록하자. 내일부터 같이 가지 뭐."

"응? 뭘?"

"뭐긴, 요가지. 그렇게 좋다며. 나도 그 좋은 거 해보고 잘 살고 싶어 지네."

"하하하(몹시 어색하게 웃는 당신, 얼굴빛이 안 좋아졌다.) 에이~ 오빠 왜 그래. 오빠가 요가는 무슨. 내가 좀 다녀보고 고수가 되면 집에서 알려줄게."

"그래, 그것도 좋겠네. 고수되려면 얼마나 걸리는데?"

"가르칠 정도 되려면 그래도 2~3년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즈음이면 나 죽을지도 몰라. 이상태로 가다간 말이지."


아내를 위해서도 딸을 위해서도 아닌, 스스로 잘 살고 싶어서 22.10.16일 요가원에 가기로 했다.


나무간판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요가원은 우리가 좋아하는 교촌치킨 건물 2층에 있었다. 1층에는 로또 1등이 배출된 복권방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기가 좋다 느껴졌다. 깔끔한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기분 좋은 향이 코를 스친다. 정면의 통창으로 깊어진 가을을 머금은 벛나무가 잎을 알록달록 물들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담한 체격이지만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다. 마스크를 썼지만 왠지 그 너머의 인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조심스레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데 쿠룬타라는 기구를 등에 대고 누우라고 하셨다. 편하게 누워서 시작 전에 몸을 이완시키라고 하셨지만 눕자마자 '편하게?'란 말이 튀어나왔다. 등을 부드럽게 이완시켜 머리를 바닥에 대라고 하는데 알다시피 내 몸이 내 맘 같지가 않았다. 잠시간의 버둥거림 후 아내와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동작을 따라 했다.


"&^%@#$% 아사나."

"&^%@#$%&^%@#$% 아사나."

이상한 외계어로 뭐라고 하시는데 기억나는 단어는 '아사나' 밖에 없다. '아사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자세라는 뜻이다. 계속되는 아사나 속에 점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다가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대가 요가원에서 군대로 트렌지션 되더니 유격 훈련을 받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누운 자세에서 다리를 쭈욱 펴고 배 쪽으로 넘겨 바닥에 대는 자세를 했는데(물론 닿지 않았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배에 쥐가 났다. 너무 아팠는데 창피한 마음이 더 커서 최대한 안 아픈 척 소심하게 웃으며 '저 배에 쥐가 났네요.' 하고는 다리를 간신히 아래로 내려놨다. 쪽팔림은 어떤 고통도 잊게 하는구나. 어쩌면 이런 것도 요가의 유익한 기능이 아닐까 싶다.


다행히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모든 동작을 마치고 '사바아사나'자세를 취하며 10분간 눈을 감고 쉬었다. 평화롭다.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기분이 든다. '사바아사나' 이 자세를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세는 우리말로 '송장 자세'라고 한단다. 송장 자세를 하고 살아있음을 느낀다니 이것이 요가의 세계인 건가.




"괜찮으시면 차 한잔 하고 가시죠."


오홋! 이것이 아내에게 들었던 차담 시간이란 거구나. 선생님이 권한 자리에 가부좌로 앉으려는데 다리가 풀려 휘청~ 다행히 선생님은 차를 준비하시느라 보지 못했다. 그러길 바란다. 커피포트에서 물이 보그르르 끓고 유연한 동작으로 차를 만들어 내는 선생님. 쌉싸하면서 그윽한 향이 입과 코를 편안하게 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보이차로군.' 태어나서 처음이다. 매일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카페인에 없이는 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었는데 스스로에게 조금 미안해지는 마음이다.



"선생님께서는 남자분 치고 자세가 잘 나오는 편이세요. 게다가 처음 하신다고 하셨는데, 소질이 있으신 거 같아요."

속으로 '선생님 거짓말쟁이'를 외쳤지만 입꼬리는 지 맘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만하셨나요?"

"솔직히 제가 뭘 했는지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조금 더 하면 조상님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한 동작 한 동작이 히말라야를 넘는 기분이었어요."


"안녕, 나 왔어. 차 마시는 중이었구나."


오픈을 축하하러 선생님의 친구분께서 오셔서 합석하셨다. 저 멀리 순천에서 요가원을 운영 중이시고 두 분 다 함주훈 선생님의 제자란다. 얼결에 요가 선생님 두 분과 차담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언니, 두 분이 부부셔요."

"와! 정말?! 너무 부럽다. 보기 좋아요. 부부가 같이 올 수 있다니."


생각해보니 아침시간에 부부가 요가원에 올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겠구나.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좋아 보일 수도 있겠다. 사실 혼자 보단 둘이 덜 쪽팔릴 거 같아서 같이 간 건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르지 않는 샘처럼 보이차가 잔에 차 올랐다. 한 사람 한 사람 빈 잔을 채우는 것이 무지 바빠 보일 수도 있는데 선생님의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보이차를 마시던 중간에 직접 덕으신 하귤 차도 선보이셨다. 두꺼운 하귤 껍질을 얇게 깎고 가위로 잘라 덕고, 마지막에 하귤즙을 부어 한 번 더 덕는다. 하귤은 무농약으로 키우기에 걱정 없이 마실 수 있다. 우리 집에도 하귤나무가 세 그루나 있는데 귀한 열매가 다 떨어질 때까지 보기만 한 것이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보이차의 쌉싸한 맛 뒤에 하귤 차의 새콤달콤 한 맛이 포개어지니 차로서도 '사바아사나'가 가능하구나 싶었다. 제 보다 젯밥에 관심 있는 아이처럼 차 마시고 싶어서 요가원에 오게 될 것 같다. 역시 차도 커피도 남이 내려주는 게 맛있다.


우리집의 하귤나무


아내는 '사바아사나'시간에 감고 있는 눈 속에서 떠도는 예쁜 보랏빛의 광채를 보았다고 했다. 무언가 신비로운 경험을 한 표정이었고 몹시 평온해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몸에서 잘 받는 모양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주시진 않았다. 그 빛이 뭘까 궁금했던 아내가 검색해 보고는 흥분해서 말했다.


"오빠, 내가 봤던 그 빛 있잖아. 차크라가 열린 거래. 초기 각성 증상 중의 하난데 7번 사하스라라가 열린 거래."


뭔 소린진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아내의 표정을 봐서는 거짓말 같진 않았다. 수련 초기생들에게는 힘든 일이라는데 단 이틀 만에 각성이라니. 역시 기가 쌘 것인가. 꿈에 내가 오토바이 타다 죽는 걸 봤다는 말도 거짓은 아닌가 보다. 순간 아내가 무서워지면서 말을 잘 듣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 첫날인데 쓰다 보니 하루 종일 한 것 같은 기분이다. 하루 겪어보고 나니 혼자 집에서 하라면 절대 오래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대로 하는 건지, 몸은 왜 이렇게 아픈 건지, 그렇게 끙끙거리다 때려치울게 분명하다. 역시 제대로 배우려면 돈을 내고 배워야 한다.


2022.10.17 (월) 요가 수련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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