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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07. 2016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갓뎀(goddamn)’이다

정치교육과 민주시민교육,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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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민주시민교육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사례로 보인다.[아래 독일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내용은 노닐다짱구패 엮음(2016),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산다>를 참고하였다.] 학교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교육은 <독일기본법> 제1조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적 자유, 제20조 자유민주주의질서의 기본 원칙과 구체적 실현 등에 터 잡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학습하고 정치 참여 능력을 기르는 것이 교육 목표다.


학교 밖 민주시민교육은 미취학 아동, 학교 밖 청소년, 성인으로까지 이어지는 평생학습 개념을 갖는다. 연방정치교육원과 지방정치교육원이 지원 업무를 맡는다고 한다. 정당, 시민대학, 정치재단, 교회, 노동조합, 직업단체, 경제단체, 청소년 및 복지단체 등 민간단체들이 교육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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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주시민교육의 ‘선진성’을 대표하는 것이 ‘보이텔스바흐 협약’이다. 우리에게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정치교육 및 민주시민교육의 방침과 기조에 대한 사회적 통합의 결과물로 알려져 있다.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첫째, 정치교육에서 교화 및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다. 가르치는 사람의 의견을 학생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학생들을 조정하여 그들이 자주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논쟁과 학문적 논쟁을 지속한다. 정치사회적으로 논쟁 중인 사안을 교육의 장 안에서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입장들이 드러나지 못하면 선택 가능성이 낮고, 대안들이 제시되지 않을 경우 교화나 주입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셋째, 정치적 관심사를 관철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당면한 정치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분석하고 자율적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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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육이 이루어지기는커녕 민주시민교육의 ‘민주’라는 말조차 제대로 통용되지 못하는 대한민국 학교에서 독일 사례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사회적 대타협의 결과물인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특히 그랬다. 한 번 찬찬히 따져보고 참조할 만한 ‘본보기’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오늘의 교육> 제32호(교육공동체 벗, 2016년 5‧6월호)에 실린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다시 묻다>(아래 ‘<묻다>’) 특집 기획 기사에서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짤막한 글을 보았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에 ‘매료’되어 있던 저간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 협약이 출현하게 된 세계사적인 맥락과 당대 독일의 정치사회적 조건 등을 통해 볼 때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아래 보이텔스바흐에 관한 내용은 이택광 교수의 글을 참조하였다.)


이 교수의 논지를 종합해 보면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일종의 ‘정치적 중립’에 기반한 정치교육으로 보인다. 앞서 살핀 바 교사의 교화나 주입식 교육을 금지하거나, 정치사회적인 현안에 대해 논쟁적인 토론을 지향한다는 것 등이 이를 방증한다. 문제가 파생되는 지점이 여기다. 정치적 중립에 기반한 정치교육이 가능한가. 이와 관련하여 이 교수는 “협약을 넘어서고 금기를 이야기하는 토론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비판했다. 왜 그런가.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철학자 카를 포퍼(1902~1994)가 정초했다고 한다. 카를 포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보스포럼의 제1회 주선자 중 하나였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다보스포럼은 오늘날 전지구적 문제의 근원적 ‘망령’처럼 비판받는 신자유주의의 기원에 자리잡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주의에 위기가 오고 경제적으론 부르주아들에게 위기가 찾아와서 복지국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건 속에서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나온 것이다. 그 당시에, 학부모들이, 말하자면 ‘바른 사회 학부모연합’ 같은 우파 사람들이 좌파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다. 우리나라의 전교조 교사 같은 이들을 공격하려고. 전쟁이 끝난 뒤니까 얼마나 첨예했겠는가. 우파 학부모 단체와 좌파 교사들이 충돌이 계속 일어났고, 그걸 중재하면서 나온 게 보이텔스바흐 협약이었다. (이택광, <오늘의 교육>, 100~101쪽)    


어떤 정치적 사안들이 교육 현장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정치적 사안들이 교육 현장에서 논의된다고 했을 때 논의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중립성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달리, 아예 논의되지 않는 정치는 교육 현장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것.     


지난 4월, 전교조에서 4‧16 교과서를 만들어 계기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교육부가 크게 문제삼은 적이 있었다.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 세월호와 관련된 이야기를 교실에서 나누는 것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본 교육 당국이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자 격렬한 논란이 일었다. 요컨대 어떤 문제는 정치교육의 주제가 될 수 있지만 다른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 ‘정치적 중립’에 기반한 정치교육,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본보기로 하는 민주시민교육의 한계가 아닐까.  

 

사안에 따라서 이야기해야 하는 게 다른 것이지, 규범을 정해 놓고 이런 이야길 하는 건 잘못됐다고 하는 건 토론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이나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에 대한 중립적 토론이나 이런 것들을, 원칙으로 갖고 있어야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중립이고 정치교육이고 정치적 토론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하나의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을 돌아봐야 하고, 냉전의 산물인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넘어서는 다른 교육 철학이 나와야 한다. (이택광, 위의 책,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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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말경 고려대학교에 다니던 한 학생으로부터 시작된 ‘안녕들하십니까’ 열풍을 기억한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맡고 있을 때였다. 대학입시 정시 전형 일정이 시작될 즈음이었는데, 몇몇 아이들이 대자보를 써 붙이겠다며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대자보를 실명으로 붙일 것인지 아니면 익명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 모양이었다. 글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민감한 내용이 없구나. 그러니 자연스럽게 애초 계획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말하자면 나는 ‘사전 검열’을 통해 아이들이 글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민감한지를 ‘임의로’ 판단한 것이다. 이는, 대자보 내용이 아니라 대자보를 붙이려는 ‘행위’ 자체를 금지한 당시 학교 측과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결국 핵심은 교실에서 정치적 토론이나 논의나 대화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다. 이 교수는 “논의될 수 있는 것과 논의될 수 없는 것, 논의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논의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토론을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금기’가 많은데, 금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그래야 금기를 넘어갈 수 있는 충돌도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언하건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은 없다. 어떤 문제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관점 자체가 정치적이다. 정치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을 ‘정치적 중립’의 프레임을 통해 정초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갓뎀(goddamn)’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철학자 카를 포퍼입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백과>(주소: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_%ED%8F%AC%ED%8D%BC)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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