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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10. 2016

교사는 버스 정류장 학생은 버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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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방학 즈음, 서울 충암고등학교 이관희 선생님이 쓴 유고작 <선생으로 사는 길>을 읽었다. 새벽녘까지 책장을 덮지 못했다. 희부윰히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보면서 울컥했다.

부끄러웠다. 이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끝까지 놓지 않으셨다. 나를 돌아보았다. 교사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교사의 허언(虛言)은 특별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듯하다.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한 말은 그 자체로 강력한 수행성을 갖는 약속이다.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순진한’ 학생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 아이들의 교사로서 한 시대를 산다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교사의 말과 행동이 천금보다 무거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작년 여름 경상남도 진주에 사는 김다운 학생이 화제가 되었다. 그해 4월 김다운 학생은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렇기에 실을 끊겠다”라며 재학 중인 경남 진주여고 2학년 과정을 자퇴했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잘 살려면 명문대학 가야 한다기에 공부 열심히 하면서 살아온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스스로에게 “나 지금 행복해”라고 물었다고 한다. 김다운 학생이 얻은 결론은 이랬다.


배움 없는 학교를 떠나자.


이 선생님 또한 고교 시절에 획일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 풍토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가 연세대학교 영문학에 입학한 때는 군 복무를 마치고도 한참이 지난 27세 때였다.


수많은 ‘김다운’과 ‘이관희’ 있다. 40만 명이 넘는 교사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이 해마다 5만 명을 훌쩍 넘는다. 아이들의 ‘탈학교’를 온전히 학교와 교사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그렇더라도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든 교사가 각자 제 몫의 책임을 다했더라도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2     


이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챙겨가며 그들을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기다림을 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교사로서 부끄럽고 비겁한 나를 돌아보며 책을 읽는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쟁과 효율이 지상의 표준이 된 세상이다. 사회와 학교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끝없이 요구한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위계 서열화한 학교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공동체의 규범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인간에게 시스템은 힘이 세다.


그래서일 것이다. 교사는 마치 두 ‘극단’의 중간을 오가며 유령처럼 살아가는 존재 같다. 놈 촘스키, 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의 비판적인 지성을 대변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교육자 조너선 코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교사들은 마치 지식의 게릴라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열기 위해 분투하는 동시에 학교에 남아 있기 위해서도 그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본질적이고 도전적이고 어쩌면 전복적일 수도 있는 질문을 하기 위해 결연한 의지를 갖고 일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의 의식주, 건강, 은행융자 같은 것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조너선 코졸(2011), <교사로 산다는 것: 학교 교육의 진실과 불복종 교육>, 양철북, 15~16쪽.

     

나는 세 아이의 학부모이자 교사로서 코졸의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 사회가 교사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자.

가령 학부모들은 교양과 지성을 기르는 인성교육과 성적과 점수 관리에 초점을 맞춘 입시교육을 동시에 요구한다. 거시적인 교육목표를 우선시해야 하는 당위로서의 교육과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현실 교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라고 은연중 강요한다. 그도 교사들의 이런 미묘한 면을 크게 고심한 듯하다.     


선생으로 내가 느끼는 가장 힘든 일이, 공부해내기만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교생들에게 유일한 삶의 낙인 컴퓨터 게임이나 TV 보는 시간의 조금이라도 쪼개어 책 읽고, 운동하고, 정서적인 시간을 마련해보라고 부탁하는 일이다. - 이관희(2015), <선생으로 사는 길>, 삼인, 300쪽.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다. 학교교육의 겉과 속을 고민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회의하는 이 선생님의 모습은, 쥐 눈만큼 작아진 양심이나마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이 땅 모든 양심적인 교사들의 것이리라.     


3     


이 선생님은 사립학교에서 일했다. 나도 그처럼 사립학교 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입이 있어도 말을 안 하고,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비겁한 교사다. 가끔 이런저런 일로 학교나 재단 측과 부딪친다. 그들의 ‘힘’은 강고하다. 함께한 동료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치사하고 더럽다. 우리끼리 학교 하나 세우자.”   

  

나는 우리 애들 엄마가 기도를 하는데 뭔지 아냐고, 자기 남편에게 학교 하나 세워주는 게 꿈이라고. 너무 심한 꿈이라서 나는 얼마든지 기도하라고 했다고. 아이들과 한마음으로 진짜 사람 만드는 교육하는 아름다운 학교에서 하루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입시교육, 미친 교육 버티며 힘겨웠다고, 나머지 교직을 3년을 버틸지 5년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 이관희(2015), 위의 책, 145쪽.

    

이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쓴 생활 노트를 보았다. “3년을 버틸지 5년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학교에서, 그래도 아이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알같이 써내려간 글씨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했다. 학교를 세울 수 없으니, 그렇게 스스로를 말로 위무하며 비루한 나날을 버텨야 했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 ‘어깨동무’라는 이름의 생활일기 쓰기 활동을 해왔다. 작년과 올해는 시간 부족과 폭주하는 업무를 이유로 ‘포기’한 채 보내고 있다. 이 선생님은 “선생은 도(道)를 닦는 수행인이어야 한다”(303쪽)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 계획표와 일기를 쓰게 하고, 거기에 일일이 답글을 적는 일을 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문장 하나라도 더 써주고 싶어 수업이 비는 공강 시간으로 모자라면 야간 자율학습시간까지 활용했다. “잠시 아이들만 사랑하기로 했던 것”(275쪽)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그 어떤 수사학적인 의도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무조건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하는데, 거의 끝까지 아이들은 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선생은 그래도 그의 말을 듣고 함께해야 한다. 기껏 한두 달 공부 좀 해보려고 하다 실망해버리고 자포자기하는 학생들이 많으므로 선생도 아이가 몇 달, 심하게는 일 년 내내 끝까지 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더라도 그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선생이란, 1학년 때 뿌린 씨는 2학년 때 혹은 3학년 때, 사실은 학교 졸업하고 나서, 중년이 되어서야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꽃 필 것을 믿어야 한다. - 이관희(2015), 위의 책,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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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아이들 말고 다수의 보통 아이들 돌봐주는 것이 선생님들의 책무라고 하신 그의 ‘절규’가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말썽부리지 않고 조용히 집과 학교를 오가는 대다수 선한 아이들의 마음을 일일이 챙겨야 한다는 말씀일 것이다.


작년 어떤 연수에서 선생님 한 분이 교사를 버스정류장에 빗댄 기억이 난다. 비바람을 맞고 서 있는 정류장을 그려본다. 비바람을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나는 정류장은 없다. 아이들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는 교사가 되고 싶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경남 진주여고 김다운 양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4748&CMPT_CD=P0001)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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