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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11. 2016

‘나름의 스승’과 ‘무지한 스승’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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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있는가. 나는 우리 모두에게 ‘나름의 스승’이 있다고 믿는다. 다른 이가 그에 대해 ‘무슨 그따위 교사가’라고 말할지라도 말이다. 이때의 스승은 다른 이의 그런 시선과 무관한 곳에 존재한다. 그 스승은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눈 속에서만 살아간다.


몇 년 전 우치다 타츠루가 쓴 <스승은 있다>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스승은 ‘수수께끼 선생님’이다. 제자가 전모를 알 수 없는 선생님이다. 우치다 선생은 이를,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무지(無知)의 선생님’으로 표현한다. ‘나’(제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지(知)가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선생님이라는 의미에서다.


이런 관점에서 논지를 펼쳐 보자. 스승은 학식이 뛰어난 이가 아니다. 학생을 잘 가르치고 재미있게 해주는 이가 아니다. 학생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고, 나름의 뚜렷한 교육적 소신이나 철학을 갖고 교육 활동에 임하는 이가 아니다. 민주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가 아니다. 스승은 ‘제 눈에 안경’과 같은 사람이다. 학식과 재미와 소신과 철학 모두를 갖고 있거나, 그중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이도 스승이 될 수 있다.    

 

2     


‘제 눈에’ 스승 몇 분을 떠올려 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나는 왼손잡이다. 글자를 왼손으로 썼다. 선생님께서 자로 손등을 치셨다. 왼손으로 쓰면 안 된다고 했다. 무서워서 오른손으로 썼다. 그 뒤부터 글자 쓰기가 거의 유일하게 오른손잡이처럼 하는 일이 되었다.


선생님에게는, 무서우면서도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다. 글 쓰기를 해서 선생님 칭찬을 들으면 온통 세상을 얻은 것 같은 환희를 느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우치다 선생이 말한 의미에서 ‘수수께끼 선생님’ 바로 그런 존재였다.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은 분이었다.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살아있는 기억 하나가 있다. 나는 옛 승주(오늘날 순천시에 편입됨.)의 어느 시골 학교를 다녔다. 1970년대 말이었다. 한 학년에 두 학급 정도밖에 없는 조그만 학교였다.


그해 초여름 무렵이었다. 도회지(순천시)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공교롭게 아버지께서 밭일 하러 가자고 하셨다. 학교에 등교하지 못했다. 하릴없이 동네 뒷골 비탈막에 있는 밭으로 가 콩 파종 일을 했다.


얼마 뒤 선생님이 허위허위 밭으로 오셨다. 학교에서 동네까지 거리가 오 리(2킬로미터) 남짓 되었다. 그 길을, 초등학교 1학년짜리를 백일장 대회에 참가시키겠다고 달려왔다. 선생님과 함께 기차를 탔다. 대회에 참가해 이름도 고색창연한 ‘차하(次下)’ 상을 탔다.


부끄러움과 감동이 두루 함께한 하루였다. 그뒤부터 ‘스승’님을 본받아야겠다며 글쓰기와 공부에 매진했다. 선생님이 되기로 작정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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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도 떠오른다. 미혼의 젊은 여선생님이셨다. 당신 역시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선생님께서 향긋한 등꽃이 만발한 교정 벤치에서 시를 읽어 주시던 어느 여름날이 있다. 나만의 착각일까. 살짝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편안하고 따뜻했던 시선을 기억한다.


내 배움의 이유는 뚜렷했다. 우치다 선생이 말한 대로, 그 선생님과의 ‘소통’과 ‘관계 맺기’를 위한 것이었다. 앎에 대한 열정은 모조리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해야 한다고 여겼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꺼이 당신의 무궁한 내면에 감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알려고 할수록 선생님은 더욱 내가 모를 존재가 되었다. 다시 정확하게 말하건대, 그 선생님은 내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알고 싶은 분이었다.


따져 보니 그동안 나에게는 ‘스승’이 제법 있었다. ‘스승’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도’ 좋은 선생님이 내게는 ‘스승’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런 선생님은 ‘스승’이 되기 힘들다. 나에게‘만’ 좋은 선생님이 ‘스승’이다. 우치다 선생 말마따나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스승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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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왜 필요한가. 스승이 나를 바꾼다. 배움의 열정과 의지가 스승으로부터 비롯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한 인간만이 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 (중략) 바보 만드는 자들의 학교에도 배움은 있다. 선생은 하나의 사물이다. 물론 책보다는 다루기 쉽지 않은 사물이다. 우리는 그것[선생이라는 것/사물]을 배울 수 있다. 즉 선생을 관찰하고, 모방하고, 해부하고, 재조립하고, 제공된 그의 인격을 실험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배운다. 선생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다른 사람만큼 지적이다. 그는 연구자가 관찰할 수 있도록 다량의 사실들을 대개 내놓는다. 해방하는 방식은 하나뿐이다. 어떤 당도, 어떤 정부도, 어떤 군대도, 어떤 학교도, 어떤 제도도 결코 단 한 사람도 해방하지 못할 것이다. - 자크 랑시에르(2016), <무지한 스승>, 궁리, 191쪽.     


나는 교사다. ‘스승’일까. 만약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떤 ‘스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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