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빈틈과 여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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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으른' 교사다. '성실'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빈틈'을 보여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나만의 교단 생존술이자, 아이들과 좀 더 여유 있게 만나기 위한 역설의 전술이다. 나는 끝없는 노력과 열성과 성실을 바라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과 학교의 잠재적인 교육과정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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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burn out)은 사전적으로 '소진'으로 풀이된다. 심신 탈진 현상을 가리킨다. 피로, 불안,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 비인간화, 무능력한 기분 들이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한다.
번아웃을, 심리 정신적 문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시킨 이는 미국의 정신의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였다. 그는 1926년 독일에서 태어나 15살이 되던 해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되었다.
1970년대, 그는 종합병원 일과 무료진료소 봉사를 병행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병원 진료를 보았고, 퇴근 후 밤 11시까지 무료진료소에서 일했다. 진료소 일을 마친 뒤에도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 바람에 새벽 2시에 귀가할 때가 많았다. 이런 생활이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프로이덴버거는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그는 환자들에게 전과 같은 관심을 기울이기가 힘들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기로 한 어느 휴가 전날도 새벽 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어 결국 휴가지로 떠나는 비행기를 놓쳤다. 그는 내리 사흘 동안 잠만 잤다.
잠에서 깬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일종의 자가 정신분석을 한 것. 그 과정을 수차례 되풀이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에서 탈진, 불안, 우울, 교만 등의 감정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불안 증세에 '번아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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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덴버거는 번아웃을 '훌륭한 미국인병'으로 명명했다. 미국식 주류 가치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는 미국인이라는 의미에서였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샤보는 프로이덴버거의 사례를 전하면서 번아웃을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규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열악하고 강도 높은 고된 노동 환경, 미흡한 규제, 불공정한 대우, 불충분한 보수, 개인간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번아웃이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번아웃은 현 시스템에 충실한 자들이 걸리는 질병, '신실한 신도'들이 앓는 질환이다. 번아웃은 '믿음의 위기', 다시 말해 희망을 품었던 자들의 환멸, 어떻게든 열심히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고 그런 사회의 보호 속에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자들이 빠지게 된 어떤 정서적 소진 상태를 의미한다." - 파스칼 샤보, <너무 성실해서 아픈 당신을 위한 처방전>,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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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보에 따르면 현 시대 이데올로기의 취약점은 오로지 적응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데 있다. 번아웃은 그런 적응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에 빗댄다. 그는 적응 자체가 목표가 돼버린 부조리함 속에서 사람들이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져버렸다고 주장한다. 일을 통한 자기실현은 꿈도 꾸기 어렵다. 끝없는 적응 속에서 삶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이제는 '현실에 적응하라'고 말하는 대신 '새로운 가치를 수용하라'고 말한다. 모든 의미가 상실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의 가치의 언어는 여전히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한 줄기 빛처럼 여겨진다. 가령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조화로운 양립은 '여성 임원'이라는 고결한 우상으로 거듭난다.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처리는 '긍정적인 스트레스'라는 가치의 탈을 둘러쓴다. 이 직무 저 직무 전전하는 삶은 '유연성'이라는 가면을 덮어쓴다.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은 '열린 정신', '고차원 사고 능력'이라는 유명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ve; 음악 용어의 하나. 지겹게 반복되는 구호 정도의 비유적 표현-필자)를 통해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의 지배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평가'라고 불리고, 독촉과 명령으로 가득 찬 전자우편 더미는 '연결성'으로 표현된다. 휴대전화를 항시 켜 두는 것을 '근접성'이라 부르고, 즉각적인 명령 이행은 '기민한 반응'이라고 표현한다. - 위의 책, 7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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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들' 중 하나가 여유와 빈틈을 허여하지 않는 학교 문화라고 생각한다. 가장 표면적으로 그것은 꽉 채워진 시간표로 대변된다.
매 시간 경계마다에 있는 10분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아이들은 교실로부터의 '탈주'가 엄격히 제한된다. 수업 시간인 한 책상을 벗어난 교실 밖 공간과 그때의 시간은 금단의 영역이다.
그와 같은 잠재적인 학교 문화가 학생과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순응과 질서와 성실에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언어와 행동과 동작을 순치한다. 서서히, 그렇지만 평생 동안 꾸준하게 우리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칠 내면의 어떤 태도를 형성시킨다. 성실하라, 그리고 노력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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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을 편견을 갖고 바라보거나, 차별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아이들의 숨통을 죄는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들이다. 여유와 빈틈이 아이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살리는 수단임을 믿는다. 아이들을 게으르게 만날 때 나 홀로 세상을 향해 내뱉는 반론이자 어설픈 변명이다.
좀 더 핵심은 적응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적응이 다수의 선과 이익의 크기를 극대화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적응은 우리 사회 피라미드 구조의 상층에 있는 소수들에 의한 지배에 복무하는 언어다. 적응의 신화는 소수 지배를 영속화하거나 절대화하려는 의도망 속에서 쓰인다. 적응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학교 민주주의를 위한 각자의 언어가 이로써 터져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