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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28. 2016

“이 정권을 쉽게 보지 마십시오”

평범한 민주주의의 역설적인 모습에 대하여

1


함세웅 신부가 어느 책[문영심(2013),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시시in북.]에서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싹이 있다고 말했다. 주권자 인민이 민주주의적인 정치 수단의 하나인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함 신부가 이 말을 통해 강조한 메시지는 인민의 끊임없는 정치 참여와 관심이었다.


“민주주의는 재력에 기초한 권력 앞에, 그리고 이 권력과 협력하거나 또는 그것에 도전하는 세습적 권력 앞에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있다. 민주주의는 사물의 원리로서의 자연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그것은 결코 역사적 필요성의 결과도 아니며, 동시에 스스로 어떠한 역사적 필요성을 가지지도 않는다.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action)’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자크 랑시에르(2011:152),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문학동네.     


2


민주주의는 영원한 미완성의 정치 제도다. 인민이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믿을 때 인민을 조롱하는 오만방자한 권력과 불통의 통치자가 출현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라인 ‘총통’ 최순실의 ‘신정정치’가 이렇게 해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들은 40여년 전 유신의 ‘원흉’ 박정희와 함께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졌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을 역사의 무대로 소환해 전경화한 것은 또 다른 수많은 ‘민주주의 인민’들이었다.


어느 페친의 글에서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린 박근혜 정권을 “‘수준 이하의 적’”으로 표현한 대목을 보았다. ‘수준 이하’가 정치를 말하는 것이라면 동의한다. 권력욕에 관한 것이라면 조금 다르다.


고 김수환 전 추기경이 박정희 유신 독재기인 1970년대에 지학순 주교 구명 운동에 나섰을 때였다고 한다. 지 주교를 구해내기 위해 박정희와의 ‘담판’을 작정하고 청와대로 향하였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김 추기경을 맞이했다.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이 정권을 쉽게 보지 마십시오. 권력을 잡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한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목숨을 내놓고 한강을 건넌 사람들”의 후예다. 최순실 ‘따위’로 권력을 내놓을 이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권력은 목숨 그 자체다.


우리는 지금 유신 잔당의 시대를 살고 있다. 칼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3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를 절대화하지는 말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적 삶이 인민이 공공 영역에 대한 토론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해악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에너지를 개인적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돌리는 사회 생활의 한 형태가 민주주의적 삶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바른 민주주의는 민주적 삶의 고유한 특성인 집단적 행동의 지나침이나 참여 부재로 대표되는 과도한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이중적 과잉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 형태인 동시에 사회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람들이 평범한 민주주의 역설적인 모습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랑시에르의 분석은 우리에게 너무 먼 미래다. 너무 많은 민주주의가 있다. 어디에도 민주주의가 없다.

스스로 꿈을 깨는 자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뉴스파타>(http://newstapa.org/35182)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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