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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Dec 05. 2016

우리의 ‘적’은 악하지 않다

1     


시인 김수영은 한 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적은 한국의 정당과 같은 섹트주의가 아니라 우리들 대 이여(爾餘) 전부이다. 혹은 나 대 전 세상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241쪽)     


수영은 1962년에 쓴 <적>이라는 시의 첫 두 연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더운 날
적(敵)이란 해면(海綿) 같다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 같다     


흡반 같은 나의 대문의 명패보다도
정체 없는 놈
더운 날
눈이 꺼지듯 적이 꺼진다     


수영에게 ‘적’은 세상 전부였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었다. 가령 저 유명한 <사령(死靈)>에 보이는 ‘적’은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시인 자신이다.

죽은 영혼[사령(死靈)]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한 번 더 그려진다.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는 시인의 옹졸과 비겁은 ‘정서’처럼 고질적이다.      


수영은 자신의 ‘적스러움’을 아파했다. 그리하여 ‘적’은 일상의 수영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2     


수영이 말하는 ‘적’은 악하지 않다. 성실하고 근면하며,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집에서 다정다감한 ‘아버지’고, 회사에서 자기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 사원’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이자, 동네 주민들과 흉허물 없이 어울리는 시민이다. 선배와 동기와 후배에게 믿음직스러운 후배, 동기, 선배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총괄한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일상의 그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아렌트가 말하는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는 문자 그대로의 ‘생각 없음’이 아니다.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생각하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동정과 연민, 공감의 결여였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이나 ‘악’이 아니었으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괴물’이자 ‘악’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 ‘적’이 되고, ‘적’의 포로가 되고, 거대한 ‘악’의 일부가 된다. 세상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정체 없는 놈”들로 넘쳐난다. ‘적’들 천지면서 ‘적’이 없는 기괴한 곳.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상은 진정한 ‘적’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정의와 진실이 사라지고, 불의에 저항하는 “나의 양심과 독기”가 ‘적’의 ‘흡반’ 아래서 가뭇없이 소멸한다. 그런 곳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무력하게 외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적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적이 없는데,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돼 버린 것일까?      


3   

  

이 시대의 ‘아이히만’들을 떠올린다. 출세에 눈이 먼 아이히만처럼, 그들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이익에 몰두한다.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고려하지 않는다. ‘나’만 존재하는 세상에 다른 이가 나날이 힘겹게 부닥치는 현실은 없다. ‘나’의 삶의 기준은 ‘나’ 자신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타인은 없다.   

  

며칠 전 본 ‘그’의 웃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학살극’이 벌어진 그날 최고 권부의 대변인이던 그의 웃음은 동영상 자막에 ‘으하하하’로 묘사되었다. 파안대소(破顔大笑)에 가까웠다.  

    

어떤 상황에서 그 자리에 섰는지 잊은 걸까. 경악스러웠다. 다행히(?) 그는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몇초 간의 변화가 더 섬뜩했다.     


박근혜, 김기춘 등 이른바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의 공감력을 떠올려 본다. 끔찍하다. 그 누구보다 공공성의 가치를 앞세우고 실천해야 할 그들의 내면이 사리사욕과 냉혹한 권력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심리학자가 거짓말을 일삼고 유아독존 식의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심리 기저를 리플리 증후군으로 진단했다.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한다고 한다.

    

또 다른 심리학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의 정점에 있고 싶어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연령을 17~18세로 추론하였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의 피의 사실들이 저수준(?)의 정신 연령이 아니라 고도의 확신에 따른 행동의 결과였다고 믿는다. 그런 ‘확신범’인 그가 5천만 국민의 최고 통치자였다! 간담이 서늘하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모른다’가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비선 국정농단의 주인공 최순실 씨와 차은택 씨와의 관계에 대해 내놓은 일관된 대답이 그것이었다. ‘진실’은 정반대의 곳에 있는 듯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권력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권한을 최대로 행사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감 결여가 지도자와 엘리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평범한 ‘적’들의 일상적인 시선과 태도가 무섭다.     


배려심이 부족한 아이들이 ‘다르거나 약한’ 친구를 장난의 표적으로 삼는다. 무사안일의 늪에 빠져 사는 교사들이 사소한 불편과 손해에 불같이 화를 낸다. 학교가 학생과 학부모를 섬세히 대하지 않고, 경쟁 구도에 몰린 학생과 학부모가 남을 짓밟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늘 속속 드러나고 있는 거악의 근원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음에 틀림없다. 만악의 중심도 그럴까.  

   

내 안에 자리잡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소환하고 싶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공화국인 한, 우리 각자가 선 자리가 어디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일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8F%8C%ED%94%84_%EC%95%84%EC%9D%B4%ED%9E%88%EB%A7%8C)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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