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제도와 교육의 본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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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학교제도와 교육은 역사성을 갖는다. 교육 주체들이 위계적인 사회 시스템이나 수구 질서에 복종하는 배경의 근인에는 역사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학교와 교육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의 무기로 쓰였다. 둘째 유사 이래 모든 권력이 교육을 적극적인 통치 수단의 하나로 활용했다.
역사적인 사례가 넘친다. 1930~1940년대 독일 나치의 전체주의 교육 시스템과 1950년대 이승만 독재 정권의 학생 동원과 통치자 숭배 교육, 16세기 초 이슬람 오스만 제국이 운영한 군사노예제도를 통해 그 일단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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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교육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주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탄도학이나 군사 배치술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수학 문제로 출제되고, 나치 기념관이나 기념물들이 예시로 활용되었다. “유대인 한 명이 500마르크를 12퍼센트 이자율로 빌려줄 경우”와 같이 돈을 밝히는 유대인 이미지를 통해 은근히 반유대인 정서를 조장했다. 유럽의 튜턴, 로마, 슬라브 민족의 인구 그래프를 작성하라면서 “1960년에 이들 민족의 상대적 크기는 얼마가 되겠는가? 거기서 튜턴 민족에게 어떤 위험이 감지되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기도 했다.
교수법에 관한 정부 지침서들은 교사와 학생들이 나치 교육위원회에서 제공한 나치 교과서를 절대적인 ‘경전’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나치 교수법은 학생들을 국가의 부속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학교는 학생들을 충성심 가득한 국민으로 만드는 병영이 되었다. 교사는 학생들을 일사분란하게 이끄는 교관 구실을 해야 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을 정부 행사의 부속품으로 써먹었다. 학교의 학사 일정이 정권의 정치 일정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당시 정부기관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당선시킬 목적으로 학생들을 강제 동원한 지지 시위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뜻과 무관하게 비가 오는 날에도 거리에 나가 이승만을 찬양해야 했다.
1960년 2월 28일에는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경쟁 상대인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구 지역에서 개최하는 선거 유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을 우려해 지역 교육위원회를 통해 대구 지역 학교들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다. 반면 자유당이 대구 유세를 한 전날(27일 토요일)에는 학교를 일찍 마치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이었던 3월 26일에는 학교별로 작문대회를 실시해 학생들에게 대통령 찬양 글을 쓰게 했다. 1959년 어느 중학교 학생이 작문대회 원고지에 “대통령 머리는 된서리를 맞아서 하얗다”라고 한 줄을 적어 냄으로써 권력자 찬양에 불만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교감에게 뺨을 수차례 맞고 반성문 작성을 강요당하다 결국 정학 조치를 당했다.
16세기 초 이슬람 제국에는 데브쉬르메(devshirme; 지원병)로 불리던 기독교도 소년 징병제가 있었다. 제국의 지배지였던 발칸 반도 전체에 제국 관리들이 집단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기독교 사제에게 세례를 받은 12~20세 사이의 소년들을 선발하는 일이었다. 각 지역과 마을을 돌면서 각기 할당된 숫자대로 심신이 건강한 소년들을 선발해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갔다. 최정예 소년들은 100명 내지 150명의 특별한 집단으로 편성되었다. 이런 식으로 매해 3000명의 기독교도 소년들이 선발되었다.
이들 노예 소년들은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가장 뛰어난 10퍼센트는 궁전에서 지냈다. 이슬람 세계 최고의 훈련을 받으면서 제국의 고위 관료가 될 준비를 했다. 훈련 기간은 2년에서 8년 정도였다. 환관들의 지도 아래 코란,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음악, 서예, 수학을 배웠다. 말타기, 활쏘기, 화기(火器) 다루기 등을 포함한 체력 단련, 그림 그리기, 책 제본하기 등의 기술교육도 있었다. 그들은 고위 장교로 가거나 대신, 지방 총독, 제국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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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치술의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모든 통치 권력은 집단 구성원들의 충성 경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위해 학교와 교육을 충성 경쟁에 맹목적으로 몰두하는 구성원들을 길러내는 시스템으로 구축한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앞세우고, 권력자 숭배를 강요하며, 국가 주도의 고위 엘리트 양성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 나치의 전체주의 교육 시스템, 이승만 정권하의 학교 통제, 오스만제국의 군인노예제도는 그 뚜렷한 사례들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불연속적인 역사는 없다. 학교와 교육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 통치권력이나 지배자가 주도하는 교육 시스템의 본질은 근대 이전과 이후를 불문하고 큰 차이가 없다. 학교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었고, 교육은 통치와 사회 유지를 구체적인 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신라의 화랑제도는 귀족의 아들만 모아 훈련시킨 일종의 사관교육 제도였는데, 철저한 고위 관료 양성 교육이었다. 이집트, 중국, 인도에도 이와 비슷한 교육제도가 이미 고대국가 시대에 있었다. 기원전 4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왕은 사제, 고위 관료, 장교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독점했다. 왕이 설립해 왕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학교교육의 기원을 국립학교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학교의 국립학교 기원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나 왕조에 따라 약간 다르게 적용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통치에 필요한 고급 관료 양성과 장교 교육을 모두 국비로 국가가 독점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같은 기관이 그 예다. 하급 관리들은 사설기관에서 길러졌다. 이들 교육기관은 국가 지원이나 개입 없이 피교육자가 지불하는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서당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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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의미의 공교육제도는 19세기 이래 근대국가의 발달과 함께 성장했다. 근대 이전 교육의 중심점은 종교였다. 교육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종교가 지배하였다. 국가가 주도하는 보편적인 공교육은 없었다. 귀족층과 부유층이 가정교사를 채용해 자녀를 가르치는 사교육이 교육의 주류였다. 대다수 가난한 농민과 노동계급은 자녀를 가르칠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절대군주제가 무너졌다. 18세기를 전후로 정치 권력의 추가 교회에서 세속정부로 기울어지면서 교육 지배권의 주인이 바뀌기 시작했다. 근대국가가 교육을 통제하였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교육 시스템이 자리잡았다.
현대 공교육 시스템이 가장 먼저 형성된 곳은 프러시아였다.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 이후 국가적 위기에 대한 대응 방식의 하나로 의무국민교육 체제를 정립해 실시했다. ‘의무국민교육’이라고 해서 민주적인 평등 이념에 기반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애국심에 기반하고 복종을 이끌어내는 국가주의 교육이었다.
당연히 19세기 독일의 국민교육이념에서 대중교육과 엘리트교육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1870년대까지 중등 이상의 교육은 전체의 2.4퍼센트만이 받았다. 표면적으로 중등 교육 이상 수준에서 교육 기회가 확대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도 실제로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귀족계급이 독점하던 교육 기회가 중간계급에게 확대된다는 의미였지 모든 계급에게 무제한적으로 개방된다는 것이 아니었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피히테다. 인터넷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D%95%9C_%EA%B3%A0%ED%8B%80%EB%A6%AC%ED%94%84_%ED%94%BC%ED%9E%88%ED%85%8C)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