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학교교육의 변천상과 그 본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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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학교와 교육의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를 비추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한국교육사 교과서들은 19세기 말 개화기 즈음의 신교육 체제에 대비되는 교육을 ‘구교육’이라고 부른다. 구교육 시스템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을 거쳐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주요 골격을 그대로 유지해왔다.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기반으로 형식과 내용 공히 중국적인 것에 기반했다. 국가는 소수 엘리트 양성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구교육 시스템은 근대 이후 교육 시스템의 특징이랄 수 있는 국민교육이나 의무교육 중심의 공교육 시스템과 거리가 멀었다. 성균관, 사학·향교·서원, 서당 들이 오늘날 대학, 중등학교, 초등학교 시스템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이 일정한 계통으로 연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가 통제하고 있던 교육은 고위 관료나 이데올로그 양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실질적인 공교육 기관으로 성균관과 사학, 향교 등이 있었다. 성균관과 사학은 국가가 직접 설립·유지하는 국립교육기관이었고, 향교는 지방관청이 책임을 맡은 공립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일종의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신교육 체제가 들어서기까지 촌락마다 설치되어 국민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처럼 존속했으나 순수하게 민간이 자율적으로 운영한 탓에 체계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힘들었다. 서당에 관한 한 일종의 방임정책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공식적인 구교육 체제의 핵심 특징을 중국 중심의 교육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당에서 처음 접하는 교과서였던 《천자문(千字文)》은 중국의 역사와 지리와 인물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천자문》과 더불어 서당에서 쓰이는 주요 교재였던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일화들 역시 안자나 제걀량 등 중국 고대의 인물들이 주인공이었다. 역사, 문학 등 거의 모든 교과 분야가 중국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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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래 천수백 년을 유지해 온 구교육 체제의 이와 같은 본질은 신교육 시스템이 도입되고 일제 식민교육이 들어선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육 체제 수립의 기준이나 기반이 중국에서 서구 열강이나 일본으로 바뀐 점을 제외하고 우리 고유의 교육 시스템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학제, 교과 편제, 교육 재정, 시설 등에서 새로운 면모를 갖춘 학교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나 그것들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서구와 일본의 영향 아래 있었다.
특히 일본은 1910년 한일병탄으로 우리가 국권을 상실하기 전부터 시작해 일제 식민치하 36년을 지나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동화주의 정책이 우리 고유의 의식과 문화를 없애는 데 동원되었다. 식민지 교육 시스템은 전체적으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 등의 구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화정책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일제의 조선 식민지 교육정책의 기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제국신민(帝國臣民)의 양성이었다. 이를, “충량(忠良)한 국민”(1938년 <소학교규정> 제1조),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신민”(1943년 <중등교육령>), “충량지순(忠良至醇)한 황국여성”(1920년 <고등여학교령>) 따위로 강조하였다. 둘째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교육이었다. 이는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맞는 교육”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인)의 상황이 고상한 학문을 받을 만한 수준이 아니므로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드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인의 일본인화,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정책, 학교교육 시스템의 일본화, 교내외 행사의 일본색 강화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초등교육에서 1개 면에 1개 국민학교를 세우는 일면 일교(一面 一校) 정책이 시행되는 등 양적 팽창이 있었으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에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정책이 계속 이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대동아건설을 가치로 내건 후부터는 교육을 침략전쟁을 위한 노골적인 수단으로 활용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 서사(皇國臣民 誓詞)>를 만들어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외우게 함으로써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요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어린이용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성인용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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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형식과 내용상의 외세 우위 현상은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45년 9월 10일 미군사령관 존 하지의 임명으로 군정장관이 된 아놀드가 행정기구의 교육부문 담당자로 미군 장교 락카드를 임명했다. 그는 입대 전 미국 시카고의 한 시립초급대학에서 영어 교수 생활을 한 경험이 전부였던 포병 대위였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락카드는 일제 시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있었던 오천석을 초청해 한국 교육지도자들을 만나 ‘한국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e on Education)’(주석)를 조직한다. 오천석 교수는 미국 코넬 대학교(학사), 노스웨스턴 대학교(석사) 콜럼비아 대학교(철학박사)에서 수학한 친미 유학파였다.
[(주석) 한국교육위원회의 인사들 대다수가 한국민주당(한민당) 계열에 속해 있으면서, 일제 치하에서 기득권을 누린 친일 경력자들이었다는 점, 이들이 우리 민족의 교육을 위한 문제의식보다 미군정과 결탁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유지・확산시키려는 데 급급한 기회주의자적인 부류였다는 일각의 비판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반공주의가 폭주하고 미국식 교육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무비판적으로 이식된 배경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천석이 중심이 되어, 당시 미국 교육의 대명사격인 존 듀이의 교육사상을 직수입하고 이를 답습하기 위해 조직한 ‘신교육연구협회’(1946년 9월), 그 뒤 이러한 미국식 교육이론을 구체적으로 교실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설립한 ‘새교수법연구회’(1946년 10월) 등이 그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오천석이 주도한 한국교육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자문기관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미 군정 치하 교육 시스템상의 모든 중요한 문제를 심의・결정하는 기구로 운영되었다. 각 도의 교육 책임자와 기관장과 같은 주요 인사문제도 한국교육위원회가 주관하였다. 미 군정의 지휘 아래 미국 유학파 출신 학자가 주도한 교육 시스템이 미국식 기조를 띨 수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 학교와 교육의 전개 과정을 범박하게 정리하면 교육의 수단화와 도구화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다. 학교는 국가와 권력 유지를 위해 충성스럽고 성실한 국민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되어야 했다. 배타적인 정치 이념과 사상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연중에 교육철학과 시스템(법과 제도)의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황국신민화 교육과 조선인 차별주의 정책,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득세했던 반공주의와 국가주의 교육 기조 등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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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국가와 권력에 종속되는 이러한 현상은 고대 이래 근대식 학교교육 시스템이 정립되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된 하나의 ‘본질’이었다. 근대 교육 시스템의 시원격에 해당하는 프러시아(독일)에서 92퍼센트의 학생들을 교육했던 국민학교(Volksschule)의 목표는 지성 발달이나 사고력 함양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였다. 학생들 대부분이 국가와 사회의 최하위 부속품 구실을 해야 했기에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다.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된 현대식 의무교육에서 길러내야 하는 인간상을,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1)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2) 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
3)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4)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5)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19세기 중반경, 프러시아의 의무학교교육 시스템이 미국으로 전해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 메이지유신으로 서구화에 매진하던 일본이 근대적인 초중등교육을 시작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교육의 출발점에는 일본과 미국을 거쳐 들어온 독일식 의무학교교육 시스템의 ‘정신’, 곧 권력에 복종하고 기성 질서에 순종하며 국가와 사회를 우선시하는 철학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은 학교 현장에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퍼뜨렸다. 일제 강점기에 들여온 일본의 군국주의식 교육철학의 잔재가 하나의 습속이 되어 학교 문화의 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국가우선주의와 반공주의, 교육입국주의와 인재양성론이 교육 담론의 저변에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 교육의 역사에서 비롯된 폐해들이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교육기본법> 제2조는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교육이념’이다. 우리나라 학교는 이러한 교육이념에 얼마나 충실한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 제임스 머셀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민주사회의 학교들이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하지 않고 그를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그 학교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이거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기껏해야 민주적 삶의 방식, 구체적으로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자신들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분명히 민주주의에 적이 될 사람들, 즉 쉽게 선동꾼의 먹이가 될 사람들, 그리고 민주적 삶의 방식에 적대적인 지도자를 옹위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교는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악을 끼친다. 이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 마이클 애플(2015), 《민주학교》, 살림터, 56쪽에서 재인용함.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1943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들의 행군 모습이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C%A0%9C_%EA%B0%95%EC%A0%90%EA%B8%B0)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