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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an 12. 2017

아이들은 스스로 읽는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36) 10대 청소년들의 책읽기와 배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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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2014, 갈라파고스)는 미국 언론인 밀턴 마이어(1908~1986)가 썼다. 마이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년 간 독일에 거주하면서 나치에 가담했던 ‘평범한’ 독일인 열 명과 심층적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재단사, 목사, 고등학생, 빵집 주인, 교사, 경찰관 들이 마이어가 만난 ‘나치 친구들’이었다. 마이어가 인터뷰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만난 사람은 독일인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단지 특정한 조건 하에서 독일에 있었을 뿐이었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그가 이곳에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나나 내 동포가 만약 그런 일련의 조건에 굴복하게 된다면 헌법도, 법률도, 경찰도, 심지어 군대조차도 우리를 어떠한 해악에서도 보호해줄 수 없을 것이다. (중략) 그러니 오래전에 나온 말은 지당하다. 즉 국가는 참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인간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그 국가도 어떠한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마이어의 책은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인간’과 ‘국가’의 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그 자체로 묵직한 주제였다. 유대인 600여만 명을 포함해 사회적 소수자와 전쟁 포로 등 총 1200만 명을 학살한 나치 광신도들의 광기 어린 역사가 482쪽에 이르는 책 전편에 깔려 있었다. 독파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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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학기 중반께였던 것 같다. 전체주의와 독재 체제의 부당한 명령과 지시에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읽기 단원이었을 것이다. 마이어의 책을 읽고 직접 쓴 서평을 들려주면서 책을 소개했다.      


주제의식, 서술 기조, 문장과 어휘, 전체 분량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할 때 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각별한 기회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나치 시대의 독일에 살게 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마이어의 나치 친구들이 “유대인은 열등하고 비열하여 격리하거나 없애야 할 인종”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식의 ‘유대인’을 만들어내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소외시켜 공포의 학살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그렇게 각 반에서 수업을 하고 나오던 어느 날이었다. 한 반 학생 하나가 복도로 따라나왔다. 책 내용에 대해, 우리 인간에 대해 짤막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말도 했다. 도서관에 가면 있을지 모르겠다고, 원한다면 책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직접 챙겨 보겠다고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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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이나 공공 도서관에 가면 대개 ‘청소년 추천 도서’ 유의 꼬리표가 달린 코너가 있다. ‘청소년 추천 도서’로 모자라 ‘중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3학년’ 따위로 학년급이나 연령대까지를 나눠 책을 소개한다. 그 섬세한 배려와 친절함이 고맙게 느껴지거나, 때로 독서 이력이 일천해 책을 보는 안목이나 감각이 낮다고 여기는 청소년들에게 효율적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청소년용’과 ‘어른용’으로 책을 구별하는 습속(?)이 널리 퍼진 지금 우리 시대가 조금 못마땅하다. 청소년과 학생이 두루 포함되는 10대 역시 어른들이 읽는 <삼국지>와 <태백산맥>을 똑같이 읽을 수 있다. 10대는 책 제목 앞에 ‘어린이를 위한’, ‘청소년을 위한’ 따위가 붙어 있지 않아도 <백범 일지>나 <전태일 평전>을 잘 읽고 역사를 배우거나 사회를 새롭게 볼 줄 안다. 아니다. 그런 책들을 읽은 뒤, 굳어버린 머리로 살아가는 어른들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세상을 상상하는지 모른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학생에게 이탈리아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편추리소설 <장미의 이름>(대학 시절 이 책을 밤새 읽으며 얼마나 전율했는지 모른다!)을 말해 주면 눈빛이 반짝인다. 서양 철학사나 종교문화사를 포함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해 보여 학생들에게 벅차겠다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추천으로 <장미의 이름>을 완독했다며 와서 촌평을 하는 중・고생들 태반의 반응은 대체로 ‘엄지 척’이다. 10대들 사이에 두루 인기가 많은 일본식 추리소설과 다른 ‘격조’나 ‘풍미’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유래가 불분명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이 있었다. 중간 중간 빠진 권수가 많았고,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헌 책들이었다.  그 책더미 속에 파묻혀 지냈다.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 무렵쯤부터 단테의 <신곡>이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니 하는 책들을 읽어댔다.   

   

스탕달의 <적과 흑>도 그때 만났다. 나는 미혼의 야심찬 남자 주인공 쥘리엥 소렐이 창문을 통해 레날 부인의 침실로 들어가 밀회를 나누는 대목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세상과 어른들의 음험한 이면을 거듭 새겨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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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용’과 ‘청소년용’을 구별하고자 하는 문화의 배후에 글과 책을 읽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시선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글읽기, 책읽기는 배움의 대상이다. 독서가 일정한 원칙이나 격률의 지배 아래 섬세한 교육 과정을 통해 익혀져야 하는 ‘경건한’ 행위가 된다. 배워 익혀야 하는 것이라니 10대들이,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글읽기, 책읽기를 ‘따분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존 홀트는 ‘읽기’를 ‘기능’이 아니라 ‘행위’로 보았다. 다음 인용문은 글자를 처음 깨치는 아이에 관한 서술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청소년 독서론’을 돌아보는 데도 참고 자료가 되지 않을까.    

 

아이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글자들을 본다. 아이는 자기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글자를 읽고 쓰고 그 글자에서 뜻을 알아낸다는 것을 안다. 그 글자들은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어느 날(우리가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면) 아이는 그 글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뜻하는지 찾아내고 싶어 하며 스스로 찾아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바로 그 순간 아이는 읽기 시작한다. 읽기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읽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에는 잘하지 못한다. 한 글자도 못 읽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하기’를 계속하도록 해주면(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 아이는 짧은 시간 내에 제대로 읽게 된다. 불과 채 몇 달도 걸리지 않는다. 다만 자기만의 방식과 자기만의 이유로 글자들의 의미를 찾게 해주어야 한다. 또 아이가 원하는 만큼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아이 스스로 노력하는 작업을 못하게 한 다음, 다른 누군가의 명령 아래 행해지는 수없이 조각나고 의미 없는 작업들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아이가 스스로 정한 이 작업으로는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낼 수 없다고 판정하면서, 읽기란 환자가 의사에게서 주사를 맞듯이 교사에게서 받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 아이가 너무나 운이 좋아서 이 모든 나쁜 일들을 겪지 않는다면 아이는 제대로 읽게 된다. - 존 홀트(2007), <학교를 넘어서>, 아침이슬, 35~36쪽.     


* 제목 커버의 배경 시잔은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다. <다음(Daum) 백과>(http://100.daum.net/multimedia/47_b15a2296a_i1.jpg)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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