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Jan 15. 2017

새 학년이 되면 나는 ‘유혹’에 빠진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37)

1     


용수(가명)는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 석차가 하위 10퍼센트 안에 있다. 가히 ‘낙제생’ 점수다. 수업 ‘태도’가 ‘특이’하다. 교과서를 펼쳐 놓은 채 엎드려 내내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한다. 용수의 책상 위와 교과서 여백과 공책에는 용수가 새겨놓은 그림과 글자들이 가득하다. 그림이나 글자와 함께 놀지 않을 때는 그냥 잔다.     

용수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복도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자주 장난을 친다. 우렁찬 목소리와 격한 동작 때문에 여러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을 때가 잦다. 교무실에 와있는 용수에게 선생님들은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한다.     


“용수 너 또 무슨 일 저질렀어?”
“용수야, 더 뭐가 되려고 그래?”     


2     


미영(가명)은 학교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학생이다. 미영과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한 것 같다. 거의 모든 시험에서 ‘올 백’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입학 이후 ‘올 백 신화’를 쓰지는 못하고 있으나 늘 학년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     


미영은 선생님들이 칠판에 적는 내용을 글자 위치까지 똑같이 공책 위에 옮겨놓는다. 가끔 농담처럼 던지는 이야기까지 메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무언가를 설명할 때 미영은 눈빛을 반짝이며 ‘메모 포인트’를 낚아채려는 사냥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교무실에 미영이 와 와있는 것을 보면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한다.     


“미영아, 담임 선생님 보러 온 거야?”
“공부 잘하고 얌전한 우리 미영이 왔네?”     


3     


학년말이 되었다.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의 여러 항목을 정리했다. 맨 마지막으로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적는 순서가 되었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누가기록’을 입력해 놓은 것이 있었다. 누가기록은 특정한 날에 관찰한, 학생 각각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판단한 ‘행동’을 기록한 일지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그 누가기록에 근거해 써야 한다.   

  

용수와 미영이의 ‘누가기록’은 각각 3건이었다. 나는 ‘적극적 행동’, ‘봉사하는 태도’, ‘활발한 자기 표현’ 등을 중심으로 용수의 입력란을 채웠다. 미영이는 ‘자기주도적인 학습 태도’, ‘다른 학생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힘든 일을 먼저 나서서 처리하는 희생적인 태도’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채웠다.      


4     


학교 교사는 끊임없이 학생들을 관찰하고 평가한다. 학생이 내보이는 언어, 동작, 몸짓, 표정, 행동, 보이지 않는 분위기 등 모든 것이 관찰과 해석의 대상이 된다. 교사는 때로 그 모든 표면적인 대상들의 이면과 배경과 근본까지 따진다. 그때 교사는 고도로 자율적인 심리학자나 사람을 보는 깊이와 넓이를 갖춘 인간학자가 된다.     


교사가 학생들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권리는 누가 왜 준 것일까.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해 그가 ‘누구’라고 규정할 때, 교사는 무엇을 근거로 그 학생들 각각을 ‘누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 각각의 ‘누구’를 이루는 요소들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 교사는 어떻게 결정할까.     


나는,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교사가 완벽한 심리학자나 인간학자가 될 수 없음을 잘 안다. 교직 경력이 1년인 교사와 30년인 교사의 경험이나 경륜 차이를 근거로 학생을 보는 눈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30년이 넘는 교사가 어떤 학생을 바라보는 눈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거나 어떤 특정한 틀에 꿰맞춰 있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 존재이며, 그것도 (부모나 주변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교사가 갖는 눈의 영향권 아래서 변해가는 존재인 것은 아닐까.


5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새로 만나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어떤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처음 며칠간 탐색 시간을 보내며 이렇게 생각한다.


“‘긍정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 녀석은 모범생이겠군. 저기 저 친구에게 ‘짖궂게’ 혀를 날름거리는 녀석은 말썽꾸러기일 거야. ‘온순해 보이는’ 이 아이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긴장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아이는 눈길을 자주 줘봐야겠어.”

   

나의 육감적인 뇌세포만이 ‘긍정적’과 ‘짖궂게’와 ‘온순해 보이는’과 ‘긴장된’의 근거가 무엇인지  안다. 이제 나는 내 판단의 근거와 이유를 되도록 신뢰하면서, 그를 뒷받침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학생들을 평가한다. 학생 평가에 관한 한 나는 무오류의 ‘신(神)’이 되어간다.     


6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평가하는 언어는 피상적이고 상투적이다. 근거라고 해봐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몇몇 가지에 국한되어 있다. 학생들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말할 때조차 교사들은 그런 얕은 근거들을 빌려와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언어로 재단해버린다.


‘이 아이는 성실한 모범생이고 저 아이는 골치 아픈 장난꾸러기야.’     


교사들의 시선은 대체로 고정적이고 획일적이고 편파적이다. ‘모범생’의 한쪽에 ‘장난꾸러기’가 있을 수 있음을, ‘장난꾸러기’의 얼굴 뒤편에 ‘모범생’이 있을 수 있음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시선은 학생들 자신이 보기에 몇몇 사려 깊지 않은 잣대들, 가령 시험 성적이나 교사에 대한 순종도(?)에 더 크게 좌지우지된다.    

 

7


나는 지금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했는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 만난 여섯 분의 담임 선생님들은 내 ‘생활통지표’에 나를 어떤 ‘성격’과 ‘태도’를 지닌 아이로 적어 놓았을까. 그것이 진짜 나의 것일까.

  

가끔 두렵다. 내가 학생부에 입력한 내용을 용수와 미영이, 그리고 그들의 부모나 형제자매, 상급학교의 선생님들이 보고 용수와 미영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내가 관찰하고 판단한 내용이 절대적인 근거가 되어 용수와 미영이를 변화하지 않는 어떤 개체로 굳혀버리는 건 아닐까.


사람됨의 본성에 관한 의문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본성이 착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는, 존 홀트가 어느 책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의미가 없고 대답이 불가능하다. 문화(환경)를 제외한 인간 존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이 사악하다고 말하는 문화에서는 사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만들어진다. 이런 예언은 자기 충족적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행동을 한다.


사람들은 나무보다도 훨씬 더 쉽게, 더 나쁘게 왜곡될 수 있다. 그리고 나무들보다 더 그 왜곡에 민감하고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이 사실이 사람들의 본성에 대해 뭔가를 말해줄 수는 없다. 오직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고 건강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삶이 다양하고 흥미롭고 의미 있고 생산적이며 즐거운 상태에 이를 때만 인간의 본성을 판단할 수 있다. 아니, 추측이나마 할 수 있다. (중략) 오직 사람들은 선하고 친절하길 원한다는 가정하에 있는 사회, 선하고 친절한 것이 적어도 약점이 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 또 계속 그렇게 유지하려고 노력할 때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 - 존 홀트(2007), <학교를 넘어서>, 아침이슬, 184쪽.


아이들은 변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 용수와 미영이 사례는 내가 만난 여러 학생들을 종합한 가상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들은 스스로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