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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an 17. 2017

끼니

적바림 (1)

1     


나는 우리 집 ‘밥 당번’이다. 간혹 아내가 밥을 짓기도 하지만 방학을 보내고 있는 요즘에는 거의 내가 한다. 


우리 집은 평소 밥상을 분업 시스템에 따라 차리고 치운다. 밥은 아내나 나 중에서 일찍 퇴근한 이가 한다. 밥상은 둘째가 편다. 행주로 밥상을 닦고 수저를 놓은 뒤 밥을 공기에 담는 일은 첫째가 한다. 밥공기와 반찬그릇 나르기는 둘째와 셋째 몫이다. 설거지는 내가 한다. 


지난 가을 처외삼촌께서 농사지어 보낸 쌀을 쓴다. 쌀독을 거실에 놓아 두었더니 좀이 조금 생겼다. 쌀을 쇠체에 담아 좀이 만들어낸 쌀똥가루(?)를 쳐내고 밥솥에 안친다.     


바쁠 때는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다. 집에서 살림을 도맡은 요즘에는 압력밥솥에 한다. 한동안 압력밥솥을 쓰지 못했다. 쇡쇡 요란하게 나는 소리가 무서웠다. 물과 불을 조절해 가며 적당한 시간을 써야 하는데 감을 잡지 못했다. 몇 번 시커먼 누룽지를 만들어내고 난 뒤에야 밥솥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되었다. 4~5년 돼가는 것 같다.     


오늘 아침이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조금밖에 없었다. 아이들 셋에게 나눠주고 나면 내가 먹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새로 지을까 말까 하다가 쌀을 안쳤다.      


입안이 깔끄러워 누룽지가 먹고 싶었다. 요란한 쇡쇡 소리가 숙지막해진 뒤 불을 줄여 한참을 더 익혔다. 잠시 후 적당하게 눌은 누룽지 향기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을 끄고 뜸을 들인 뒤 뚜껑을 열었다.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진 밥을 전기밥솥으로 퍼 옮겼다. 노르스름한 누룽지가 솥바닥에 소담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와 짠지와 양념김을 놓고 맛난 한 끼를 먹었다.     


2     


‘끼니’는 통시적(通時的)으로 ‘끼+니’로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끼’는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밥을 먹는 횟수를 나타낸다. ‘한 끼’, ‘두어 끼’처럼 쓰인다.      


역사적으로 ‘끼’는 ‘ᄢ그’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ᄢ그’는 15세기 언해류(諺解類) 문헌의 ‘하ᆞ간ᄢ긔’에서 그 시원형(始原形)이 발견된다. 언해류가 일종의 번역물이어서 ‘하ᆞ간ᄢ그’의 뜻을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일시(一時)’다. ‘ᄢ그’에 ‘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끼니를 거르다’를 ‘때를 거르다’처럼 쓰는 까닭이다.


우리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김치를 썰어 내 한 ‘끼’ 밥상을 차린다. 한 ‘끼니’ 밥을 먹을 때마다 쌀과 소금과 채소와, 그것들 모두의 대순환 또는 조합이 우리 몸에서 마무리된다. 실상 마무리가 아니다. 끼니가 있어야 우리 숨줄이 이어진다. 이어질뿐더러 그 끼니의 힘으로 또 다른 목숨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끼니는 생명 활동이다.     


3     


먹을 것 넘쳐나는 세상이어서일까. ‘끼’, 그러니까 ‘때’를 변변치 않게 여긴다. 세상이 그런 곳으로 바뀌어 대다수가 바쁘게 살아간다.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아예 거른다. 그렇게 한 때를 거슬러도 손을 뻗치면 먹을 것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는 그 먹을 것을 만들어 내놓아야 한다. 허름한 식당에서 내놓는 7천 원짜리 백반 한 상에 올라가는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과 반찬 너댓 가지 속에 수많은 시간과 공간의 품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의 땀과 정성이 들어있다. 집밥 한 상에도 밥을 차리는 어머니나 아버지나 그밖의 다른 어떤 식구(食口)의 소박한 바람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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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아이들을 건사하고 있다. 세 끼 챙기는 일이 여간만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 입으로 밥숟가락이 드나드는 걸 떠올리며 속으로 흐뭇해 하다가도 끼니 챙기는 일의 귀찮음을 투덜대며 밥을 짓고 상을 차린다. 밥상 위에 숟가락 젓가락을 투닥거리며 놓고, 식구들 들으라고 일부러 요란한 소리가 나게 설거지를 한다.     


그럴 때 나는 이즈음 같이 추운 겨울 어느 날, 이른 새벽녘 일어나 솔가리에 불을 피워 가마솥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이시던,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뒤란쪽으로 난 쪽문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오시던, 입에서 시린 김이 나오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러면 나는 다시 오롯이 경건해지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단아하게 놓게 되는 것이었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오늘 아침 만든 누룽지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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