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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15. 2016

협력인 듯 협력 아닌 협력 같은 경쟁을 하라고?

경쟁과 협력의 ‘이중구속론’

1     


‘자존심(自尊心)’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다.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     


‘품위’라는 고상한(?) 단어가 들어있는 것이 낯설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이 품위다. 한 사람의 인격적인 ‘무게감’이 자존심으로 결정된다. 그의 내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색깔이 자존심을 통해 드러난다.     


자존심이 결여되면 다양한 심리적 장애가 일어난다고 한다.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이와 관련하여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카렌 호나이라는 심리학자는 모든 신경증(노이로제)을 ‘기본적 믿음’의 결여에서 찾았다. 해리 스택 설리반은 습관적인 자존심의 결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고 보았다. 에이브러햄 매슬로 역시 자존심이 충족되면 자신감, 가치, 정신력, 능력, 만족을 느끼고 자신이 유용하고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주장했다.     


경쟁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다. 콘은 낮은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위해 경쟁한다고 보았다.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려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별로 능력 없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고자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것을 특히 잘하는 것에서 큰 성취감을 맛본다. 타인과 비교해서 무엇인가 잘하는 것에서 성취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단지 잘한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지며,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굳이 남들과 비교해서 더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 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기준(정답을 맞힌 문제가 몇 개인지, 혹은 1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의해 개인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알피 콘, <경쟁에 반대한다>, 137쪽)          


2     


‘통제위치(locus of control)’는 자신의 운명을 그 스스로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용어다. 내부통제위치 경향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외부통제위치에 휘둘리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외부 현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심리학자 캐럴 에임스는 1970년대 중반 경쟁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연구해 경쟁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스스로의 의지나 통제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만든다는 사실을 밝혔다. 경쟁 구조에 더 자주 노출되는 사람일수록 외부 상황에 쉽게 흔들리면서 어떤 일을 이루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이겠다.     


경쟁과 협력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교육학자인 데이비드 존슨과 로저 존슨 형제는 협력 학습이 경쟁 학습이나 독자적 학습에 비해 자존심을 더 높이며 건전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게 했다고 보았다. 협력은 정서적 성숙, 좋은 인간관계, 강한 정체성, 타인에 대한 신뢰와 낙관 등 심리적 건강함을 나타내는 많은 지표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또한 경쟁은 외부통제위치를 조장하고 협력은 내부통제위치 경향을 갖는다고 서술했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협력학습 모형을 실험한 앨리엇 애론슨도 협력학습을 하는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학급 아이들보다 자존심이 훨씬 높아졌다고 결론 내렸다. 사회학자 루스 루빈스타인은 경쟁적인 여름방학 캠프에 참여한 10~14세 아이들과 경쟁 없는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을 비교 조사(설문지에 답을 적는 방식)하는 방식으로 자존심을 측정했다. 경쟁적 캠프의 아이들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비경쟁적 캠프 아이들은 남녀 모두 자존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경쟁을 통한-필자) 승리는 어떤 의미 있는 방식의 만족감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패배의 고통을 보상해주지 못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경쟁의 구조에 있다. 어떤 경쟁이든 영구적인 승리란 있을 수 없으며, 잠시 동안 이긴다는 사실이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회사의 임원이든, 슈퍼볼의 챔피언이든, 혹은 가장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든, 1등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라이벌의 표적이 되는 것일 뿐이다. ‘산속의 왕(King of the Mountain, 높은 곳이나 일정한 장소에 왕이 된 사람이 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 왕을 밀어내고 그 공간을 차지해야만 새로운 왕이 될 수 있는 놀이-옮긴이)’은 아이들의 놀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모든 경쟁의 원형이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고, 그 목표가 되는 위치에 올라 있으면 겉으로 만족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에는 불안감이 쌓인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사람이 다시 패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 위의 책, 150쪽     


3     


경쟁의 해악은 명백하다. 협력의 이점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함께 같이’의 가치와 의의를 잘 안다. 경쟁을 말하면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순적 태도가 이런 데서 만들어진다. 존 실리라는 학자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아이들은 경쟁을 해야 하지만 경쟁적인 사람으로는 보여서는 안 된다. 학교는 겉으로는 협력을 ‘증진’하고, 은밀하게는 경쟁을 ‘묵인’함으로써 이러한 딜레마에 대처한다.” - 위의 책, 159쪽.     


이러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이중구속(double-bing)’이 있다. 사람들에게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정보를 줌으로써 두 가지 모두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이중구속에 빠진 사람들은 판단이 흐려져서 심리적 파괴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4     


교육 분야만큼 협력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해야 하는 부문이 있을까. 그런데 경쟁을 알게 모르게 내면화하게 만드는 각종 경멸적이고 사소하며 천박한 수단과 기제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가 교육 현장이다. 성과상여금 제도가 대표적이다. 나는 협력과 경쟁을 통해 교단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성과금 제도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협력을 말하면서 경쟁을 조장하는 이런 이중구속의 상태가 아이들과 교사들을 ‘위하려는’ 목적 차원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성과금 제도는, 교단 분열을 조장하고 교사들을 열패감에 빠뜨리는 악제라는 식의 반대 주장과 달리 교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놀라운 일이다. 일단 다음과 같은 언급에 주목하자.     


지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아이들을 경쟁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 발달에 관한 별로 믿기지 않는 추정, 즉 아이들을 심리적 박탈에 자주 노출시키면 앞으로의 힘든 삶에 더욱 작 적응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추론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와는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더 인간적일뿐만 아니라 훨씬 설득력 있다. 어렸을 때부터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껴야지만 어른이 되어서 부닥치는 많은 심리적 문제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다.  - 위의 책, 161쪽.    


경쟁은 자존심에 악영향을 준다. 협력과 달리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게 하는 내적 의지와 역량을 키워주지 못한다. 패배와 승리에 대한 두려움, 타인을 이기는 것에 대한 죄의식, 경쟁 자체가 주는 불안함 등을 조장한다.
      

그런데도 경쟁 자체의 기능-그것이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에 대한 뚜렷인식 없이-에 관한 뿌리 깊은 편견과 그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경쟁을 내면화한다. 한편으로 협력의 의의를 강조하는 흐름에 떠밀리면서도 경쟁을 당연시하는 이중구속 상태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경쟁은 사회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스템이 ‘개인의 경쟁적 투쟁 → 사회 내부의 적대감 증가 → 개인의 고립 → 불안감 → 더 높은 경쟁적 투쟁’(위의 책, 165쪽)의 악순환을 불러오면서 사회 전체를 비극의 시나리오 속으로 몰아넣는다. 경쟁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 경쟁과 협력에 관한 연구, 학자들의 견해, 이론 들은 미국 교육학자 알피 콘의 <경쟁에 반대한다>(2009, 산눈)를 주로 참고하였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에이브러햄 매슬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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