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바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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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저자가 쓴 좋은 책에서 좋은 문장들을 만난다. 또 다른 좋은 저자들과 좋은 책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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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케이(1849~1926)는 스웨덴 사람이다.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교육자, 사상가로 소개되어 있다. ‘교육’과 관련한 책들을 읽으며 몇 번 만난 듯하다.
국내에 ‘알바니프리스쿨’로 제법 알려진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의 책 ≪길들여지는 아이들≫(2015, 민들레)에서 케이를 다시 만났다. 메르코글리아노는 케이를 교사, 페미니스트, 저술가로 소개했다. 1900년 출간되어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된 케이의 저서 ≪어린이의 세기(The Century of the Child)≫ 한 대목을 비중 있게 인용했다. 오늘날 학교제도의 한 측면을 돌아보게 한다.
현대의 학교는 물리법칙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성사시켰으니 한때 존재했던 것을 완전히 소멸시킨 일이다. 알고자 하는 욕구, 혼자 힘으로 활동할 수 있는 능력, 관찰할 수 있는 재능, 이 모든 자질은 아이들이 입학할 때는 가지고 있었으나 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사라져버린다. 이런 자질은 실제 지식이나 흥미로 변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들이 8살에서 19살까지의 인생 전체를 매시간 매학기 책상 앞에 앉아 보낸 결과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수저로, 이어서 국자로, 결국에는 한 사발씩 지식을 복용하고 교사가 종종 너댓 번은 우려먹은 조제법으로 만든 지식의 혼합물을 들이마신다. (중략) 이 기간을 벗어나면 젊은이들의 정신적 식욕과 소화력은 모두 파괴되어 진짜 양분을 섭취할 능력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만다. -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2015), ≪길들여지는 아이들≫, 민들레, 62쪽.
아이들은 길들여지고 통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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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조금 다른 책 이야기다. 내가 케이를 만난 책들은 대개 ‘강단 교육학’ 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 대학 교과서 냄새가 폴폴 나는 교육철학과 교육사 책을 몇 권 통독했다. 주마간산격으로 읽어서 그랬을까. 엘렌 케이라는 이름자를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어린이의 세기≫는 “20세기 교육학의 ‘이론적인 성서’로 불리는 루소의 ≪에밀≫이나 페스탈로치의 저서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인터넷 ‘위키백과’의 촌평이다. 이에 걸맞게 교육학 교재 곳곳에서 두루 강조되어야 하지 않나.
내가 인터넷에서 본 촌평은 정혜영 공주교육대학교 교수가 번역해 출간한 ≪어린이의 세기≫(2012, 지만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훑어보니 편역본이다. 원전 ≪어린이의 세기≫의 핵심 장 세 곳만 따로 떼내 우리말로 번역했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국내에 엘렌 케이의 원전 전체를 번역해 출간한 책이 아직 없지 않나 싶다.
버쩍 책 욕심이 났다. 아마존을 둘러보았다. 최근 연도에 간행된 책이 보이지 않는다. 동명의 책이 한 권 있는데, ‘어린이 디자인(?)’인가 하는 엉뚱한 주제의 책이었다. 메르코글리아노가 책에서 인용한 위 대목의 출처를 후주에서 찾아보았다. 1909년 미국 뉴욕 ‘Putnam’ 출판사에서 간행했다.
무려 108년 전 책이다. 문득 지식이나 연구의 편중과 획일적이고 편협한 교육철학과 학교제도교육을 둘러싼 음모(?)와 쟁투 등 여러 가지 두서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미국 중심으로 치우친 우리나라 제도교육권이 보기에 스웨덴은 변방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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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예의 정 모 교수에게 책이나 수소문해봐야겠다. 부질없는 책 욕심일 것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엘렌 케이다. 인터넷 '다음(Daum) 백과'(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1XXX9600068)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