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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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나야폴랴나(Yasnaya Polyana)’는 제정러시아 시대인 1862년에 작가 레오 톨스토이가 자신의 영지에 세운 ‘학교’다.[야스나야폴랴나에 관한 내용은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2015), <길들여지는 아이들>, 민들레, 84~87쪽을 참조해 정리함.] 톨스토이는 이 학교를 열기 전에 여러 나라를 돌아보았다. 독일, 스위스, 영국을 여행하며 그 나라의 교육 상황을 알아보았다.
독일에서 권위주의적인 교육방식을 보고 깜짝 놀란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왕에게 기도를 올리고 교사가 학생을 때리며 학생은 닥치는 대로 외우고 두려움에 떨면서 도덕적으로 불구가 되고 있다.”
그 뒤 톨스토이는 프리드리히 프뢰벨을 만났다. 프뢰벨은 유치원 교육을 최초로 시작한 독일 교육가였다.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은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학교 준비에 착수했다. 영지에 살고 있던 농부들의 자녀 중 취학 연령에 있는 40명 남짓의 아이들에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저택을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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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나야폴랴나에 다니는 학생들의 일과는 어떠했을까. 톨스토이와 동시대인으로 미국 시인이자 소설가인 어니스트 크로스비가 이를 자세히 묘사했다.
매일 아침 8시 저택 현관에 매달린 작은 종이 울린다. 30분쯤 뒤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늦거나 꾸물거렸다고 꾸중을 듣거나, 결석하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책, 공책, 판서용 석판이 필요 없다. 수업을 위해 따로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숙제와 같이 전날 배운 것을 외우거나 하는 의무가 없다. 크로스비는 다음과 같이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스나야폴랴나의 교육철학을 전해주었다.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감수성이 물씬 배어나오는 천성, 그리고 학교에서는 오늘도 어제만큼이나 행복한 일만 있을 거라는 확신만 가지고 오면 된다. (중략)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야스나야폴랴나에서는 명령으로 아이들을 강제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질서정연하고, 속닥거리지 않으며, 사소한 장난을 치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방해될 정도로 크게 웃지도 않는다.
수업 시간은 자유롭다. 학생들이 수업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면 한 시간짜리 수업이 세 시간으로 늘어난다. 교사가 수업을 마치려고 할 때 “아직 안돼요, 아직은요!” 하고 외치기도 한다. 학생들은 학교에 와야 한다고 강요받거나, 와서 계속 있어야 하거나, 있는 동안 집중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는다. 크로스비는 이를 “무질서, 아니 그보다는 자유로운 질서”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질서가 전혀 다른 제도에 무난히 적응해 살고 그 제도에 따라 지금의 모습으로 교육받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두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 다음으로 놀라운 점은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힘을 사용하는 일은 사람의 본성이 무시되고 경멸당하는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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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학생들에게 해를 입힐 목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기’라는 은유가 있다.[존 테일러 개토(2015), <수상한 학교, 민들레, 181쪽.] 근거 없는 수사가 아니다.
학생들은 만화,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대중문화 장르에서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물을 가장 즐겨한다.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보편화(?)한 이미지에 따르면 학교는 통제와 억압 공간의 전형으로, 교사는 꼰대 이미지의 본보기처럼 그려진다.
학교 잔혹사는 유서가 깊다. 개토(2015)를 따라 몇몇 사례를 만나보자.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어느 유명한 송시(訟詩)에서 학교가 야기하는 괴로움을 고찰했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에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훈육의 고통이 묘사되어 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유행한 노래 ‘학창시절(School Days)’에는 학교에서 “회초리의 곡조”에 맞춰 수업을 받았다는 가사가 나온다.
1919년 미국의 아서 칼훈은 <가족의 사회사>에서 아이들이 피를 나눈 가족의 품을 떠나 “전문가의 관리하에”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공교육은 “부적격자들의 짝짓기를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었다. 개토에 따르면 칼훈의 어조는 경탄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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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경탄하는 칼훈의 어조는 낯설지 않다. 우리는 학교를 욕하면서도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낸다. 아이들을 더 나은 학교에 보낸다는 명분으로 가혹한 경쟁 시스템을 받아들인다.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 기저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사람’이 된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학교에 대해 좀 더 욕심을 내는 이들은 학교가 아이들에게 사회화의 미덕과 고양된 도덕과 인성을 안겨준다는 숭고한 목표를 떠올린다.
자크 루세랑은 열여섯 살에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6백 명으로 조직된 레지스탕스를 이끈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폭파, 암살, 격렬한 사보타주 작전으로 프랑스를 독일에서 해방시키는 데 앞장섰다. “현실의 도덕적 물음과 실제 세계가 완전히 결여된” 학교를 떠난 후 불과 몇 달 만에 이룬 혁혁한 공이었다고 한다. 루세랑에게 학교는 이런 곳이었다.
도덕의 냄새 같은 것이 있는데 학교에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한 무리 사람들을 강제로 한 방에 모으면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정말 그랬다. 아이들이 모이면 냄새는 더 빨리 퍼졌다. 열 살에서 열네 살 된 사내아이들이 한 방에 갇힐 때 쌓이는 분노, 가로막힌 자립심, 거절당한 움직임의 욕구, 사그라든 호기심이 얼마나 쌓이게 되는지 생각해 보라. - 존 테일러 개토(2015), 위의 책, 179쪽.
개토는 학교에 ‘냄새’가 있다고 했다. 톨스토이가 150여년 전 세운 야스나야폴랴나의 냄새와 루세랑이 20세기 초에 다닌 학교의 냄새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나는 냄새는 어디에 가까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