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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겨울방학을 하던 날이었다. 교육정보시스템, 일명 ‘네이스(NEIS)’에 집적되는 학생생활기록부(학생부) 입력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수주 전부터 간간이 자료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겨가며 입력했다. 쉽게 마감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호기롭게 ‘자료검증’ 버튼을 눌렀다. 새빨간색의 ‘확인필요’ 메시지가 컴퓨터 화면 속 네이스 시트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촤르르 떴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은 ‘창의적체험활동’의 ‘자율활동’란이었다. 학기 중간에 전입해 온 강수(가명)의 이수시간 계산이 계속 맞지 않았다. 혼자 끙끙 앓으며 이리저리 해보다 결국 일과계(시간표) 업무를 담당하는 박 선생님(가명)에게 도움을 구했다.
우리는 함께 머리를 맞댔다. 곧 박 선생님이 제안한 ‘비책’을 동원해 가뿐히 해결했다. 골치 아픈 문제를 풀어 시원했으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던 마음이 생겨나더니 점차 짜증과 분함으로 바뀌어갔다. 속으로 생각했다.
‘대한민국 교사들은 네이스의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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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일’이다. 교사의 일, 임무를 규정해 놓은 <초·중등교육법> 제20조 제4항을 보면 “교사는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로 되어 있다. 교사의 일은 이토록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법률이 규정한 ‘일’일 따름이다. 실상은 다르다. 놀라지 마시라. 교사들은 수업을 ‘일’이나 ‘임무’로 여기지 않는다. ‘진짜 일’을 하는 사이사이 해치워야 하는 ‘잡무’쯤으로나 볼까. 자칭 타칭 수업 전문가들이니 수업을 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것 정도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사들이 하는 ‘진짜 일’은 무시로 내려오는 공문에 맞춰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예의 네이스에 개별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관한 정보들을 일호 차착 없이 정확하게 입력하는 것이다.
언필칭 ‘정확하게’다. 입력 정보가 시스템에 맞지 않으면 무정한 오류 정보는 교사들의 시간을 무한정 잡아먹는다. 교사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교사들은 수업을 관성적으로 한다. ‘진짜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해치운다’고 말해도 될 수준이다. 실제로 대다수가 수업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수업은 수업이고 학생은 학생이다! 더구나 이 나라의 착한 학생들은 교사들이 으레 그런 줄 알고 적당한 선에서 맞춰준다.
그러나 ‘진짜 일’을 할 때 교사들의 의식과 사고 회로는 전혀 다른 경로를 따른다. 수업을 하면서 ‘책임감’이나 ‘책무성’을 떠올리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네이스에 무언가를 입력할 때, 교사들은 무한책임과 책무성의 전사가 된다.
그들은 정부와 교육청이 정한 법률과 지침과 기준과 요령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홀로 고민하고 사색하며, 동료 교사와 더불어 토의하거나 뜨겁게 토론을 벌이기까지 한다. ‘잡무’(수업)에 관한 대화는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 몇 마디면 끝나지만 ‘진짜 일’에 관한 대화는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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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네이스에 입력해 관리해야 하는 ‘진짜 일’의 리스트와 구체적인 항목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인적사항: 학생의 성명·주민등록번호·주소와 부모의 성명·생년월일 및 가족의 변동사항 등.
2. 학적사항: 학생의 입학 전 학교의 이름 및 졸업 연월일, 재학 중 학적 변동이 있는 경우 그 날짜 및 내용 등. 이 경우 학적 변동이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17조의 조치사항에 따른 것인 경우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여야 한다.
3. 출결상황: 학생의 학년별 출결상황 등. 이 경우 출결상황이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17조의 조치사항에 따른 것인 경우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여야 한다.
4. 자격증 및 인증 취득상황: 학생이 취득한 자격증의 명칭, 번호, 취득 연월일 및 발급기관과 인증의 종류, 내용, 취득 연월일 및 인증기관 등.
5. 교과학습 발달상황: 학생의 재학 중 이수 교과 및 과목명, 평가 결과, 학습활동의 발전 여부 등.
6.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학교교육 이수 중 학생의 행동특성과 학생의 학교교육 이수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견 등.
‘1~6은, <초·중등교육법>과 <초·중등교육법시행령>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초·중등교육법시행규칙> 제21조에 있는 ‘작성기준’이다. 1~6 각각의 콜론(:) 앞에 있는 표제어들은 <초·중등교육법> 제25조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과 함께 등장한다.
학교의 장은 학생의 학업성취도와 인성(人性) 등을 종합적으로 관찰·평가하여 학생지도 및 상급학교(<고등교육법> 제2조 각 호에 따른 학교를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학생 선발에 활용할 수 있는 다음 각 호의 자료를 교육과학기술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작성·관리하여야 한다.
1~6에 이어 ‘7. 그 밖에 교육목적에 필요한 범위에서 교육과학기술부령으로 정하는 사항’이 하나 더 있다. “교육목적에 필요한 범위”에서 교육부가 정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가. 학교정보
나. 학생의 수상경력
다. 학생의 진로희망사항
라. 학생의 창의적 체험활동상황
마. 학생(중학생과 고등학생 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준하는 교육과정 이수 중에 있는 학생만 해당한다)의 독서활동상황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보는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진짜 일’들의 목록이,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 시스템이 공교육제도를 통해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간의 어떤 전형적인 기준을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인적사항’. 통제와 동원을 위한 핵심이자 기본이다. ‘너희는 우리 손아귀에 있다. 따르라’는 것. ‘학적사항’과 ‘출결상황’과 ‘학교정보’. 위계서열화한 학교시스템에 대한 개별 학생들의 적응도, 물리적인 성실도, 경제적 부담 능력 들을 재는 척도들이다. ‘자격증 및 인증 취득상황’과 ‘학생의 수상경력’과 ‘학생의 진로희망사항’. 인적자원(human resources) 또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으로서의 등급 산정과 적합도 판정에 필요하다.
‘교과학습 발달상황’. 자기규율화와 자기통제의 수준을 가늠하는 요소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권위(학교, 교사)에 대한 충성도를 판별하게 한다. ‘학생의 독서활동 상황’. 학생 의식 형성의 요인과 변천 과정을 역추적해 내면 심리를 추론하는 단서로 쓸 수 있다.
이렇게 삐딱하게 해석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그러나 묻고 싶다. 저 저열한 ‘작성기준’들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결코 ‘개인’을 드러내지 못하는 1~6의 개인정보들이 “학생지도 및 상급학교의 학생 선발”이라는 ‘현실적인’ 목적에 복무해도 된다는 판단은 누가 했나. 가~마의 민감한 개인정보들이 뒷받침하는 ‘교육목적’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려 깊은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토론하고 성찰했나. ‘교육적으로’,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그것들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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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료교사를 괴롭힌 ‘자율활동’의 이수시간에는 ‘자율’이 없다. 강수의 네이스 페이지에 뜬 수많은 누가기록들에서 강수가 경험한 ‘창의적 체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요령부득이다.
네이스는 이제 우리 교사들에게 학생들 각각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입력을 위해 내용 정보의 구체적인 근거를 일자별로 누가해 기록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나는 어떤 학생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란에 “평소 학급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라는 한 구절을 입력하기 위해 모월 모일 행한 ‘궂은 일’을 기록해야 한다. 기분 좋은 ‘관찰’이라면 좋으련만 ‘일’ 처리를 위한 ‘사찰’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런 내가 정말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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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나. 어제도 오늘도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진짜 일’을 했다. 내일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네이스와 학생생활기록부의 노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