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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13. 2017

‘수상한’ 학급사

교육 소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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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을 ‘순회교사’로 시작하기로 했었다. 국어 교사 수 대비 1인당 기준시수를 계산해 보니 6시간이 모자랐다. 교과 ‘막내’인 내가 자원했다. 학교에서는 순회교사에게 학급 담임을 맡기지 않는다고 했다. 새 학년도 업무배정표의 학급담임란에 내 이름이 없었다.  


학년 종업식이 있던 9일 내가 맡기로 한 순회 수업이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전날 실시된 전북교육청 전체 교원인사 발표에 따른 결과로 보였다. 애초 내가 맡은 순회수업 6시간이 관내 전체 중학교의 국어과 수업시수 틀 안에서 조정된 것이다.


우리 학교에 1년 전임 기간제로 오시는 타학교 선생님이 맡기로 한 학급을 내가 맡기로 했다. 인사 이동이 없는 사립학교여서 다른 학교 문화나 분위기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순회수업을 통해 약간은 경험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게 무산되어 조금 서운했다.


5년째 학급 담임을 맡게 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나 부담감 같은 것이 있었다. 순회교사 생활을 하면서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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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학급 담임’을 교사생활의 ‘꽃’이라고 한다. 30명 남짓 되는 학생들을 챙기고 보살피는 일이 쉽지 않다. 그만큼 담임으로서 학급을 잘 꾸려간 뒤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크다는 말이겠다.


학급 담임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새 학년을 준비하는 봄방학 무렵이 되면 담임 물망에 오르는 선생님들 사이에 큰 관심사가 생겨난다. 새로 맡게 되는 학급에 어떤 학생들이 편성되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대개 선생님들은 자신이 맡는 학급에 얌전하고 착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오기를 바란다.


학급 편성은 학교 전체적으로도 중대한(?) 문제다. 이른바 ‘문제아’들이 한 학급에 몰려있게 되면 해당 학급뿐만 아니라 학년 전체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한 학급에 편성되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갈라놓기도 한다. 우스우면서 안타까운 일이다.     


3     


교사와 학교가 학급 편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학급은 담임의 통제 아래 움직이는 작은 ‘왕국’이나 ‘가족’ 같은 집단이다. 학급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담임의 관할권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학급 내 학생들의 일에 관한 한 담임이 일차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재 학급 편성의 일차적인 기준은 동일 학년이다. <초‧중등교육법> 제24조 제3항의 “학교의 학기·수업일수·학급편성·휴업일과 반의 편성·운영, 그 밖에 수업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에 따라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46조에서 “학교의 학급편성은 같은 학년, 같은 학과로 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에 근거한다.

학급 편성을 학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초‧중등교육법> 제26조의 ‘학년제’에 따른 것이다. 학생 진급이나 졸업을 학년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학년제다.


동일 연령대의 동일 학년을 기준으로 학급을 편성하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비록 예외적인 단서처럼 제시해 놓았지만, 학교의 장은 교육과정의 운영상 특히 필요한 경우에 2개 학년 이상의 학생을 1학급으로 편성할 수 있다. 농‧산‧어촌이나 도시 구도심지의 소규모 학교에서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진급이나 졸업 역시 무조건 학년제를 따를 필요는 없다. 법령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학교의 장은 관할청의 승인을 받아 학년제 외의 제도를 채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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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제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학급 편성 관행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한 현상이다. 제도로서의 학교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지던 초창기부터 그랬을까. 학급제 편성의 역사를 일별해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면 ‘관리되는 아이들’과 같은 개념이 학급제의 형성과 발달에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학급’은 근대적인 단어였다.[아래 ‘학급’에 관한 내용은 그의 명저 <아동의 탄생>(1973;2003, 새물결) 299~318쪽을 참조했다.] 1519년 에라스무스가 영국의 세인트-폴 학교에 대해 묘사하면서 인문주의자인 유스틴 요나스에게 쓴 편지 속에 최초로 등장한다. 다만 ‘학급’에 대한 개념은 그보다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중세 시대의 학교에서는 동시 교육이 보편적이었다. 15세기 초까지 교사들은 조교와 함께 10명에서 몇 백 명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을 한 장소, 가령 커다란 강당 같은 곳에 모아놓고 가르쳤다.


새로운 구분법이 나타난 것은 15세기 중반이었다. 지식의 정도에 따른 집단별 구분, 각각의 집단을 상대로 한 교사들의 개별적인 교수 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리에스는 이를 “중세적 전통을 따랐던 동시 교육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진보적인 교육으로의 이행의 결과”(위의 책, 302쪽)로 묘사했다.     


교육을 학생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려는 관심은 동시적 혹은 반복적인 중세의 교육 방법과 정반대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지 않으며 인생을 위한 준비인 학교 수업과 인생으로부터의 획득물인 교양을 같은 것으로 보는 인문주의 교육 방법과도 대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학급의 분리는 아동기 혹은 청년기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아동기 혹은 청년기 내부에는 여러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필립 아리에스(1973;2003), <아동의 탄생>, 새물결, 316쪽.  

   

학급은 아주 서서히 서구 학교교육의 역사에서 정규적인 학업과정의 요소가 되어갔다. 학급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취학기의 아동기가 따로 떨어져 나오는 식으로 학생 인구가 세분된 16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다만 학급 범주 구분 기준이 오늘날과 조금 달랐던 것 같다. 학생들의 연령을 일차 기준으로 하는 오늘날과 달리 연령과 발달 정도를 함께 고려하여 학생들을 나누었다. 당시 사람들은 연령보다 발달 정도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학급이 학생들을 나이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능력과 과목의 난이도에 따라 나누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라는 것.


학급이 연령 구성상의 균질성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사람들은 소년이 어머니나 유모, 혹은 하녀의 품을 떠나는 5~6세를 유아기의 최소 하한선으로 잡았다. 그 최대 상한선은 9~10세였다. 어린아이들의 유약함이나 유치함이나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본격적인 학령기 시작이 10세 무렵까지 유예되었다. 10살짜리 아이가 유아기에 포함될 수 있었다는 것.


유아기가 이런 식으로 분리되었다 해도 시대에 뒤떨어진 연령의 혼재는 나머지 학생 인구에서 지속되었다. 17~18세기까지 10~14세의 아이들, 15~18세의 아이들, 19~25세의 청년들이 같은 학급에서 공부했던 것이다. 18세기 말까지 아무도 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19세기 초에야 ‘수염이 난’ 20세 이상의 성인 학생들이 완전히 제외되었지만 여전히 콜레주에 있었던 나이 많은 청년들의 출석에는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 필립 아리에스(1973;2003), 위의 책,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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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학교는 아이와 어른을 구별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19세기 초 연령에 따른 학급 편성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학급 편성 관행이 정착하였다. 균일한 연령대에 적합한 교육방법이 채택되면서 학교 규율과 질서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출현했다. 이제 학생들은 통제되고 관리되는 ‘미숙한 존재’라는 식의 사고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스탠리 홀이 ‘청소년기(adolescench)’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했을 때,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청소년기가 병리학적 상태라는 것, 따라서 위험스러울 정도로 비이성적인 시기인 이 청소년기를 학교에서 심리학적 수단을 동원해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홀이 만들어 낸 청소년기 개념은 국가 주도 학교교육을 십대 중후반으로까지 연장하는 데 정당한 구실로 작용했고 이제 인생에서 생산적 기운이 가장 넘쳐나는 기간을 제도화하여, 아이들을 가두고 심리적 기법으로 치료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 과정에서 교육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채 국가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이들의 훈련에 대한 독점권을 받아 업무를 수행했다. - 존 테일러 개토(2010;2015), <수상한 학교>, 민들레,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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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가오는 새 학년도에 ‘15살’로만 이루어진 33명의 ‘청소년기 사람’들을 우리 학급(반)에서 만난다. 얼마 전까지 그들의 최대 관심사가 새 담임이 누구이며, 어떤 또래 사람들이 같은 반에 오는가 하는 문제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법령이 강제하는 수업일수 190일 이상을 한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로서 당연한 반응이다.


뒤늦게 학급담임을 맡기로 결정된 나는 우리 반에 어떤 15살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이른바 문제아들이 몰려 있을 수 있다. 다만 나는 그들 문제아들이 언젠가 제도권 학교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각자의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며 당당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믿는다.


나이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학급 형성에 관한 ‘수상한’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표지다. 인터넷서점 <알라딘>(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29860)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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