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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14. 2017

그가 학교를 떠났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42)

1     


작년 11월 그가 학교를 떠났다. 15살이었다.     


2     


<누가복음> 제2장 41~47절은 예수의 소년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부모와 떨어진 예수가 있었던 곳은 유대인 학자들이 유대교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성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유대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랍비들과 함께 ‘맞짱 토론’을 했다. 무언가를 듣고 묻기 위해 예수 스스로 간 그곳이 곧 학교가 되었다.


예수 나이 12살 때 일이었다.     


3    


1950년에 태어난 영국 소년 리처드 브랜슨은 열두 살 때 15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혼자서 자전거로 일주했다.[이하 리처드 브랜슨과 잉그바르 캄프라드의 일화는 존 테일러 개토가 쓴 <수상한 학교>(2012, 민들레)에서 가져왔다.] 그의 모험심은 일찍이 만 네 살 때 입증되었는데, 그 경험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그때 브랜슨은 어머니가 모는 차를 타고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런던 교외를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브랜슨이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차를 세운 어머니가 브랜슨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집까지 찾아올 수 있겠니?”


브랜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렸을 때 난독증(難讀證: 지능, 시각, 청각이 모두 정상인데도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증세)으로 고생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17살 때 자퇴한 뒤 잡지를 창간했다. 열아홉 살에 취미로 시작한 중고 레코드 판매 사업이 버진 레코드, 버진 항공으로 이어지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대학 교육을 단 하루도 받은 적이 없었다.   

  

4     


난독증으로 고생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1926년 스웨덴 남부에서 태어난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학교 전문가들에게 난독증 진단을 받았다. 학교 생활에서 재미를 찾지 못한 그는 어릴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자전거에 물고기, 연필, 가방 등을 싣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팔았다.


사업 품목이 점점 늘어났다. 성냥과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그의 자전거에 실렸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17살에 ‘이케아(IKEA)’라는 회사를 창업해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시계, 스타킹, 넥타이, 양말 등 다양한 잡화를 우편으로 판매하다가 5년 후부터 가구 장사를 시작했다.


1950년대 스웨덴 정부의 주택 100만 호 건설 사업에 힘입어 가구 주문이 크게 늘었다. 1958년 캄프라드는 저렴한 가격에 아름답고 실용적인 가구와 생활용품을 살 수 있는 이케아 가구점을 오픈했다. 난독증 진단을 받은 성냥팔이 소년은 이제 세계적인 거부 빌 게이츠보다 더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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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자수성가 부호 25퍼센트는 ‘중퇴자들’이라고 한다.[<한겨레> 2016년 4월 4일자 기사 참조]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스티브 잡스, 스티브 워즈니액은 모두 대학 중퇴자들이다. 영국의 인터넷 마케팅 업체인 버브 서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계의 자수성가형 부호 4분의 1에 해당하는 이들의 최종학력이 대학 또는 고등학교 중퇴자들이었다.


학교 ‘중퇴’를 ‘성공’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으리라. 학교를 끝까지 다니면서 자수성가하고 명성을 얻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날 학교가 왜 많은 학생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가. 역량과 잠재력이 있고 장래가 촉망 받는 많은 학생들이 왜 학교에서 뛰쳐나오는가.


미국에서는 매일 7천 명, 연간 150만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둔다고 한다.[존 테일러 개토(2012), <수상한 학교>, 민들레, 82쪽.]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몇 년간 한 해 평균 5만~6만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고등학교 중퇴자는 3만 명에 육박한다. 하루 평균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학교 교문을 나서고 있다. 학교 밖 청소년 수는 30여만 명에 가깝다.


학교가 온전한 의미의 배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공간이어서일까. 그런 면이 있다. 2006년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졸업하기 얼마나 배우는지 조사했다. 예일, 브라운, 조지타운 등 유명 대학교를 포함해 50개 대학 1만4000명의 학생이 조사에 참여했다. 조사 결과 예일, 브라운, 조지타운을 포함한 16개 대학의 졸업반 학생이 신입생보다 학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나머지 34개 대학에서는 측정 가능할 정도의 학력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학사 학위를 바라보며 평균 6년을 소비하고, 또 부채와 현금으로 평균 25만 달러를 지출해도, 대다수 학생은 투자에 비해 얻는 게 거의 없거나 오히려 손해를 본다. 이들이 얻는 것은 출신 학교와 본인의 이름이 적힌 부적 한 장뿐이다. 코미디 배우도 웃고 갈 만한 소재다. - 존 테일러 개토(2012), 위의 책,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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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담임교사인 나는 15살의 그를 유예 처리했다. 그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간 190일에 이르는 법정 수업일수의 3분의 2를 결석했다. 수차례 그와 부모를 만나 대화했다.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법령에 따라 유예 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지금 스스로 세운 ‘인생 시간표’에 따라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데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독서 경험이 풍부한 그가 써 내놓는 글에서는 알지 못할 묵직함이 기품 있게 묻어난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그 나름의 관점과 철학이 글에 또렷이 담겨 있다. 또래 학생들이 쓰는 글과 달리 고유한 색깔이 있다.


유예 처리를 마무리한 뒤 그에게 책 세 권을 주었다. 며칠이 지나 스마트폰으로 짤막한 ‘비평문’이 날아왔다. 이미 읽은 한 권에 대한 소감은 간단했다. 처음으로 접한 두 권에 대한 독후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책을 통해 그 자신과 인간과 세상을 돌아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내준 ‘과제’로서의 독후감이었더라도 그런 결과물이 나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교사로서, 그의 일 년을 책임진 담임 교사로서 무책임한 말로 들렸을지 모르겠다. 그에게 “공부와 배움의 장소가 꼭 학교여야 한다는 관점이 구시대적인 사고법 중의 하나라고 본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제 딴에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길’에서 느낄 법한 두려움을 벗고 힘차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영국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사냥꾼의 폭력에서부터 양치기의 권력이 된다”라고 말했다. 사냥꾼은 짐승을 잡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양치기는 양들에게 복종하는 방법을 가르쳐 그들을 교묘하게 조종한다. 양들은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 양치기를 순순히 따라다닌다. 오늘날 학교가 ‘양치기의 권력’을 갖고 있다면 지나칠까.


그의 진정한 속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예를 기꺼이 맞아들였다. 제도와 법령이 강제하는 학교 시스템을 그 나름의 이유로 거부한 뒤 학교를 뛰쳐나갔다. 혹시 그는 학교를 ‘권력’이 아니라 ‘폭력’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진정한 권력은 동의와 복종에 터를 잡는다. 기꺼이 학교제도에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학교에 동의하지 않았다.

    

7     


성전에서 예수를 찾은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누가복음> 제2장 48절)라고 물었다.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제2장 49절)라고 대답했다.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예수의 말은 신성을 모독하는 불온한 발언이어서 잔혹한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자문해 본다. 12살 예수가 그런 것처럼 우리 집 아이가 현실적인 위험과 불이익을 불러올 수도 있는 불온한 말을 할 때 나는 어떻게 대꾸할 수 있을까. 리처든 브랜슨처럼 15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여행하겠다는 아이를 흔연히 보낼 수 있을까. 난독증 진단을 받은 잉그바르 캄프라드 같은 학생이 우리 반에 있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학교가 진짜 공부와 배움의 장소가 되어야겠다. 학교 밖이 또 다른 공부와 배움의 장소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내가 떠나보낸 그가 자신만의 그림과 글로 세상에 당당히 서는 사람으로 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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