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바림 (7)
1
우리 집 첫째 아이는 4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녔다. 둘째와 셋째가 어린이집 신세를 진 건 그보다 어린 3살 때부터였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른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야 하는 아이들을 보는 게 늘 안타까웠다. 살아가는 형편 탓이거니 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2
아이들이 이른 나이 때부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나가는 것을 별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아이들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한다. 유치원 같은 유아교육기관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정해진 절차와 형식에 따라 통일성 있게 ‘관리’한다. 나는 국가 차원의 통합유아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누리과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대개 어린이집 복도에서는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걷는다. 공원에 나들이 나간 유치원생들은 선생님 호령 소리에 구호를 외치며 질서 있게(?) 걷는다.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마냥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 둘째 아이 학예 발표회 자리였다. 공개 수업(활동?) 참관을 했다. 선생님이 사자성어 카드를 들어 보이면 아이들이 함께 뜻풀이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선생님의 손짓과 팔 동작에 따라 아이들 모두가 밝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일정한 음보율을 따르듯 목소리들이 리드미컬하게 나왔다. 훗날 선생님과 둘째가 알게 되면 대단히 서운해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수업은 마치 어른 로봇과 아이 로봇들의 말하기 경연대회 같았다!
3
현대적인 의미의 유치원 교육을 본격화한 프리드리히 프뢰벨은 “어린이들을 위해 살도록 하자”라는 금언을 남겼다. 스웨덴 교육자 엘렌 케이는 프뢰벨의 그 말을 “어린이들로 하여금 살도록 하자!”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기계적인 습득 훈련과 방법의 형식과 집단의 압박으로부터 어린이들을 해방시키자는 의미에서였다.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은 동일성을 지니도록 훈련되고 있다. 어린이는 자신의 학교 규율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동료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배운다. 나중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한 양심, 정의감, 충동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대학, 군대, 관청에 대한 복종과 충성심 등을 배운다. 대중이 아니라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인간의 가치와 힘을 결정짓는 모든 그런 충동을 발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이가 가능한 한 어린 나이에 자신의 선택의 자유와 위험, 자신의 의지의 권리와 책임, 자신의 시련의 조건과 과제를 배울 때만 가능하다. - 엘렌 케이(1900;2012), <어린이의 세기>, 지식을만드는지식, 124~125쪽.
3
케이는 유치원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면서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를 강조하기 위해 ‘가정’ 대신 ‘가정학교’라는 말을 씀.)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학생들이나 교육과정에 관한 한 학교가 유연하게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 깊이 공감한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10명이나 20명, 또는 30명 이상이 함께 보내는 유치원이나 학교 교실은 불편하고 위험한 공간이다. 개인으로서의 ‘나’가 숨 쉴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다.
케이에 따르면 또래들과의 생활은 집단적인 우둔화를 가져온다. 집단이 행사하는 강한 여론의 압력 때문이다. 아이들이 ‘일반적인 의견’이나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래 중 누군가가 옷차림이나 취향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가차 없이 비판하기도 하는 게 아이들이다. 획일화나 집단화의 결과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4
‘나’가 먼저고 ‘우리’가 나중이다. ‘나’를 살리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나’가 진정한 의미의 ‘개인’이 되는 게 어렵다. ‘개인’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individual’은 ‘나누어질(divide) 수 없음(in)’을 의미한다. 개인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다른 무엇의 소유물이거나 부속품이 아니다.
그런 개인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럴 때 자존감 넘치는 ‘나’의 내면에서 정의와 양심과, 타인(그 또한 진정한 ‘개인’이어야 할 것이다.)과의 진심 어린 유대감이 생겨난다.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독창적인 일을 수행했던 거의 모든 위대한 남녀들의 경우에, 일부는 학교에 전혀 다니지 않았고, 다른 일부는 다소 늦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거나 중간에 쉬었다가 다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여러 종류의’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우연적인 일이었다. 생동적인 직관, 비밀리에 읽혀진 책, 스스로에 의한 재료 선택, 이런 것들이 특별히 예외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도야되도록 했던 것이다. - 엘렌 케이, 위의 책, 129쪽.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프리드리히 프뢰벨이다. 인터넷 <나무위키>(https://namu.wiki/w/%ED%94%84%EB%A2%B0%EB%B2%A8)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