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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16. 2017

기게스의 반지

교육 소뎐 (4)

1     


토요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다. 그래도 조심스럽다. 슬며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선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을 벗으며 안방으로 들어선다.


네 발이 달린, 가로로 누운 기다란 나무상자 모양의 흑백 텔레비전이 보인다. 화면을 숨기는 잠금문이 달린 ‘원시적인’ 텔레비전이다. 여느 때와 똑같다. 좌우 양쪽으로 열고 닫는 미닫이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나는 그것을 여는 열쇠가 어디 있는지 잘 안다. 열까? 몇 분을 사이에 두고 생각이 요동친다. 안 된다. 어린 나는 텔레비전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 그래 열자!


나는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유리문을 연다. 조잡하고 단순한 모양의 열쇠가 시계 추 바로 아래 놓여 있다. 그것을 꺼내 텔레비전 잠금장치의 열쇠구멍에 넣는다.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미닫이를 연다. 로터리 모양의 채널 다이얼 스위치를 돌리자 찰칵 하고 전원이 켜진다. 몇 번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흑백 화면이 환하게 밝아진다.


머리가 또 어지러워진다. 아버지가 갑자기 들어오시면 어떻게 하나. 몰래 텔레비전을 켠 걸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그 전에 잠깐만 보고 모든 걸 원래대로 해 놓은 뒤 시치미를 떼면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든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초등학교 3학년(2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10살 꼬마의 머릿속으로 ‘양심’과 ‘거짓말’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착한 아이인가 나쁜 아이인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일은 내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 최초의 경험이었다.     


2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있다. 플라톤은 <국가> 제2권에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토론을 길게 묘사했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라는 이름의 형 둘이 있었다. 글라우콘은 플라톤의 둘째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주제는 ‘올바름’이었다. 여기에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가 비중 있게 소개되고 있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이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에 관한 사례로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내며 질문을 던진다.


옛 리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동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심한 뇌우와 지진이 일어난 뒤 땅이 갈라졌다. 들판에서 양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던 목동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뒤 갈라진 땅 아래로 내려갔다.


목동 앞에 속이 비고 자그마한 문들이 달린 청동 말 한 필이 보였다. 그는 문 아래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 크기보다 더 커 보이는 송장이 있었다. 송장의 몸에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는데, 다만 손에 금반지 하나가 끼여 있었다. 그는 반지를 빼내 밖으로 들고 나왔다.


며칠 뒤 목동은 그 반지를 끼고 왕궁으로 갔다. 매달 왕에게 양들에 관한 사항을 보고하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 목동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던 그는 우연히 반지의 거미발(노리개, 반지, 비녀 따위의 장신구에 보석이나 진주로 알을 박을 때, 빠지지 않게 물리고 겹쳐 오그리게 된 삐죽삐죽한 부분. 모양이 거미의 발처럼 생겼다.)을 자신을 향해 손 안쪽으로 돌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동석한 사람들이, 마치 목동이 그 자리를 빠져나간 사람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깜짝 놀란 그는 반지 보석받이(거미발)를 밖으로 향하게 돌렸다. 그러자 다시 보이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목동은 반지가 그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해 보았다. 거미발을 안으로 돌리자 보이지 않았고, 밖으로 돌리자 다시 보였다.


목동은 일을 꾸며 왕에게 가는 사자들 행렬에 끼었다. 왕궁에 도착한 그는 왕비와 간통을 했다. 그 뒤 왕비와 더불어 왕을 덮쳐 살해하고 왕국을 장악했다.     


3     


그날 오후 나는 ‘기게스의 반지’ 거미발을 안쪽으로 돌려 투명인간이 된 목동과 비슷했다.


그때까지 제도로서의 학교교육을 3년 정도 경험했다. 30여 호 되는 농촌공동체에 통용되던 관행과 관습의 영향, 극빈은 아니었지만 하루 세 끼를 거르지 않고 먹으려면 집안 식구 모두가 일 년 내내 고된 농삿일을 해야 했던 가족공동체의 습속과 분위기의 자장 아래서 살았다.


그런데 ‘나쁜 짓’을 했다(고 하자). 스스로 물어본다. 내가 경험한 교육과 삶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한 ‘나쁜 짓’은 실패한 교육과 삶의 증거일까. 나는 지금도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나쁘고 어리석다’고 할 만한 일을 한다. 그때마다 움찔한다. 나를 움찔거리게 하는 그 힘은 인간인 나의 생득적인 본성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니면 교육(가르침)과 같은 후천적인 경험을 통한 습득의 결과일까. 이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을까.


나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우화로 해석한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우리는 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배웠다. 이들 개념에 따르면 선한 본성의 인간과 악한 본성의 인간이 대립한다.[‘텅 빈 서판’의 정신관, 가령 존 로크 유의 ‘백지설’과 같은 관점은 다른 글에서 다룬다.]


교육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전자를 따르는 교육은 인간을 신뢰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선한 본성을 키우거나, 혹시 그것을 잃었다면 회복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선한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제도, 법, 사회를 문제시한다.


후자를 따르는 교육에서는 부정과 악덕을 타고나는 인간을 부정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인간은 극복의 대상이다. 교육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제어하고 통제하며 개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제도와 법과 사회 시스템을 적극적인 수단으로 활용한다.   

  

4     


나는 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일체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어떤 인간, 무엇을 위한 인간인가. 교육철학의 출발점과 교육사의 장구한 흐름이 이 질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교육 행위’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존 테일러 개토(2015), <수상한 학교>, 민들레, 245쪽에서 재인용함.]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련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주어 자리에 ‘인간’이 놓이지만 대답에서는 이를 ‘교육’으로 바꿔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만들어낼 수 있다.    

 

교육은 인간 내면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관여한다.
교육은 인간 삶의 목표와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교육은 인간에게 도덕 관념과 그에 대한 실천력을 갖게 한다.
교육은 인간의 내면과 품성을 변모시킨다.     


나는 이들 중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마지막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교육이라는 필요를 낳았고, 그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교육의 목표와 방향이 달라졌다.


‘기게스의 반지’가 있다. 교육자(부모, 교사, 어른)인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그때 당신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 당신이 내놓는 대답에 따라 칸트가 제시한 나머지 세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색깔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교육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이, 가정과 학교와 이 세상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펼쳐놓은 말과 행위들 역시 마찬가지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인터넷 한국어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wiki/%ED%94%8C%EB%9D%BC%ED%86%A4#/media/File:Plato-raphael.jpg)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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