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43)
1
몇 년 전 책 한 권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희대의’ 범죄자 신창원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다.
신창원이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닐 때였다. 학교에 내야 할 돈을 챙겨가지 못했다.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고 말했다. 신창원은 그 말이 가슴에 ‘악마’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교사는 학생을 ‘말’로 가르친다. 교사에게 언어는 교육 활동의 처음이자 끝이다. 신창원의 이야기를 읽으며 교사의 말 한 마디가 학생들에게 어떤 위력을 주는지 새삼 깨달았다.
교사의 진실하고 배려심 넘치는 말이 굳게 닫힌 학생의 마음을 연다. 단단히 지성에 터 잡고 있으면서도 겸손한 말 한 마디가 학생에게 진정한 배움의 욕구를 자극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규정했다. 교사의 말 속에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관점이 그대로 투영된다. 교사의 생각이 그가 하는 말을 통해 드러난다.
신창원에게 ‘새끼야’를 내뱉은 예의 선생님에게 신창원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누군가의 ‘새끼’뿐이었을 것이다. ‘어린 놈이’ 운운하며 화를 내는 교사에게 학생은 미성숙한 존재에 불과하리라. 그럴까.
2
중세 시대 아이들은 젖을 떼자마자 곧장 어른들의 세계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어른들과 함께 일하고 노는 ‘작은 어른’처럼 인식되었다. 학교에서는 ‘수염 난’ 어른들과 함께 공부했다. 근대 초기 프랑스에서는 10대 중‧후반대에 이른 청소년들이 군인으로 복무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사회에서 분리되어 과거와 전혀 다른 인생의 한 시기를 오랫동안 보내게 된 것은 ‘학교교육’이라는 ‘감금 과정’이 확립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 이후부터였다. ‘학생’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일 뿐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가 현대 심성사(心性史)의 고전이 된 <아동의 탄생>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내용이다.
3
학교는 절대불변의 공간이 아니다. 제도로서의 학교는 통시적인 역사의 맥락 속에 위치한다. 운영체제, 구성원의 위상, 보이지 않는 교육과정으로서의 학교문화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을 “학생은 ‘학생’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이다”라는 명제로 제시하고 싶다.
아이 같은 어른이 있듯이 어른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있다. 나이가 더 많다거나 교사라는 이유로 학생들을 함부로 단정하거나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교사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유관순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3‧1운동의 주역으로 떠올랐을 때 나이는 17살이었다. 3‧1운동 당시 서울 전동보통학교에 다니던 학생 4명이 “보통학교는 아이들을 모아 노예로 삼으려는 장소”라고 외치며 교실 유리창을 깨뜨렸다. 모두 11살, 12살이었다. 방정환은 9살에 ‘소년입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토론회와 강연회를 이끈 ‘사회운동가’였다!
1960년 4‧19 혁명은 서울 시내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없었다면 크게 폭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촛불’의 최초 주역은 여중생이었다. 어제 경북 구미 오상고 학생들은 교육부와 학교의 국정 역사교과서 연구학교 공모 ‘꼼수’에 반기를 들어 신청을 철회시켰다. 시대의 길목과 역사의 모퉁이마다 미성숙하여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학생들과 청소년들이 거리에 나서 그들의 ‘언어’를 뜨겁게 토해냈다.
4
얼마 전 엘렌 케이의 <어린이의 세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 케이는 “일반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들은 그들이 행하는 것에 의해 평가되고 고귀한 본성을 지닌 존재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것에 의해 평가된다”고 말했다. “활동의 세기” 안에서 잊혀진 “관조의 세기와 어린이의 세기에 다시금 기억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였다. 다가오는 새 학년 새 학기 화두로 삼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