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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26. 2017

“미친 개를 때려잡듯 그들을 죽여야 한다”

교육 소뎐 (7) 루터와 보통교육 사상: ‘해방사’로서의 교육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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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은 만성절이었다.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인 이날, 34살의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궁성 교회 출입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자신의 서명을 직접 새긴 게시문에는 면죄부 제도의 고발을 제도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면죄부는 당시 레오 10세가 이끌던 로마 교황청과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등이 신도들에게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교황 레오 10세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수리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1514년 8월 18일 추기경 회의에서 대주교로 임명된 알브레히트는 추인비와 ‘자발적인 화해비’ 등으로 불리는 거액을 챙겨 교황청에 넘겨야 했다. 알브레히트에게는 당대의 탁월한 금융가 야코프 푸거에게 빌려 쓴 고리대금도 있었다.


1515년 3월 31일 면죄부 판매에 관한 교황의 교서가 발행되었다. 전체 판매액 중 절반을 교황의 금고에, 나머지 절반은 알브레히트의 금고에 넣는 것으로 정했다. 면죄부는 1517년 초부터 판매되기 시작해 2년여간 이어졌다. 그사이 막시밀리안 황제가 끼어들어 수익금을 삼등분하게 되면서 알브레히트 주교에게 돌아가는 몫이 크게 줄어들었다.


루터는 이미 1년여 전부터 면죄부에 대한 설교를 통해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뤼시앵 페브르는 <한 인간의 운명 마르틴 루터>에서 1517년의 95개조 반박문이 그런 일련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출현했다고 보았다. 페브르는 루터의 행위를 권력자들을 향한 전쟁 선포가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규율을 따르라는 경고로 해석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심문하기 위해 로마 소환 명령을 내렸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보호해 주었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공개 논쟁에 참석해 가톨릭 측 신학자 요한 에크와 논쟁을 벌였다. 루터는 뜻을 굽하지 않았다.


1520년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바빌론의 포로가 된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등의 저작을 통해 부패한 당시 교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시대 현실에 적합한 교회를 건설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는 곧 독일 하층 민중들의 영웅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해 10월에는 60일 안에 참회할 것을 명령한 교황의 조서를 군중 앞에서 불태우면서 개혁 의지를 다졌다. 이제 로마 교황과 황제를 제외한 독일 전체가 루터를 따랐다.


1521년 4월 17일부터 26일까지 보름스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교황의 거듭된 요청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연 보름스 회의는 루터와 같이 로마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열렸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교황과 황제는 루터에게서 제국 법률로 보호받을 권리를 박탈했다. 그를 돕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도 내렸다. 1521년 5월 4일, 위기에 처한 루터는 작센 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치밀한 계획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 보호 감금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년여 간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핍박 받고 방황하던 독일 민중들에게 강력한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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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년 6월 독일 슈바르츠발트 남부의 농민들이 봉기했다. 바텐, 프랑켄, 작센 등으로 번진 혁명의 불길이 15만 명의 농민들을 불러보았다. 그 중심에 한때 열렬한 루터 지지자였던 토마스 뮌처가 있었다. 그는 농민군이 수립한 ‘영구 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농민군은 도시와 장원과 성과 수도원을 공격했다. 귀족의 토지와 재물을 빼앗고, 악독한 귀족 영주를 처단했다.


루터는 농민들이 들고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다. 면죄부 판매에 반발해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에 맞서려 했던 34살의 젊은 수도사는, 나이를 조금씩 먹고 독일 사회의 복잡미묘한 현실에 눈을 뜨면서 오히려 개혁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자리에 섰다. 농민혁명군의 지도자가 된 뮌처가 '프라하 선언'을 통해 교회와 봉건 영주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자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미친개를 때려잡듯 그들(농민 개혁 운동가)을 모조리 목매달아 죽여야 한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마르틴 루터다. 인터넷 한국어 <위키 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D%8B%B4_%EB%A3%A8%ED%84%B0)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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