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소뎐 (8) 루터와 보통교육사상: ‘해방사’로서의 교육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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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선두에 선 전사가 권력층과 기득권자들의 대변인이 되는 사례는 희귀한 일이 아니다. 다만 루터의 경우는 그가 인류 사상사나 문명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훗날 엥겔스가 루터에 대해 “하층민의 운동뿐만 아니라 시민 계급의 운동마저 제후에게 팔아넘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나친 평가라고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루터의 역사적 의의를 지레 깎아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의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촉발된 개혁 분위기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사회 재편을 위한 뜨거운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루터 이후 유럽을 포함한 서구 전체는 바야흐로 근대를 향한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교육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루터는 <아동을 취학시켜야 하는 일에 관한 설교>(1530년)를 통해 아동 취학 의무화 사상을 설파했다. 모든 부모가 귀천과 빈부와 남녀 구별없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하며, 정부는 그 국민들에 대하여 아이들의 취학을 강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공교육제도 확립을 강조했다. 교육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기조로 학교가 공공단체의 공적 경비에 의해 공적제도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학교 설립과 유지 책임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국가(정부)라는 점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오늘날 공교육(public education) 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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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나 교육철학 교과서들은 “모든 국민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보통교육 사상의 출발점이 16세기 초 종교 개혁에 있었다고 기술한다. 보통교육은 대개 두 가지 제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동 의무 취학 시스템과 공교육 제도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가 종교 개혁 시기에 발흥한 보통교육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교육사에서 의무 취학 시스템과 공교육 제도가 정식 법령의 형태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중반경이었다. 1642년에 독일 고타 공국 영주 에른스트가 고타 교육령을 공포하였고, 역시 같은 해 영국 청교도(칼뱅주의자)들이 미국 동부 보스톤에서 매사추세츠 교육령을 제정하였다.
고타 교육령은, 당시 루터파 신교도로서 종교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교육론을 펼친 교육학자 라트케(1571~1635)와 코메니우스(1592~1670) 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의무 취학제, 학급 편성, 학교 관리, 교육과정, 교수법 등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전문 16장 435조로 이루어진 고타 교육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내용은 아동 취학 의무화 규정(제2장), 아동의 통학에 대한 부모의 책임에 관한 규정(제361~435조조)이다. 고타 교육령은 아동 취학 의무화 규정을 법제화한 최초의 사례다.
매사추세츠 교육령은 신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의 국가 책임을 인식한 바탕 위에서 만들어졌다. 매사추세츠 교육령은 현대적인 공교육 시스템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공립학교의 제도화, 부모나 고용인이 그 자녀나 피고용인을 교육시킬 의무에 관한 내용, 지방자치단체의 학교 설치 의무 및 의무교육 감독권 인정, 모든 주민을 상대로 한 교육세 부과, 교육세와 일반 세금을 활용한 모든 아동의 무상교육 실시 규정 등이 두루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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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폭발한 종교 개혁은 사람들에게 그때까지 여전히 잔존해 있던 중세적인 질서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 세기 후쯤 아동 의무 취학 시스템과 공교육 제도의 법제화(고타 교육령과 매사추세츠 교육령)를 가져온 루터의 보통교육 사상이 교육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한 가지 짚어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 루터의 아동 취학 의무화 사상이나 교육의 국가 책임론을 어떤 배경과 목적 차원에서 이해할 것인가다. 루터는 아동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교육을 강조하였다. 교육 훈련 시 매질과 같은 체벌을 반대하면서 아동의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성장을 촉구했다고 한다. 국가가 교육을 책임지는 의무 취학 시스템을 통해서는 구현하기 힘든 목표들이다. 그의 진의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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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엥 페브르에 따르면 루터는 1525년 이후 거의 독일어로만 글을 썼다고 한다. 엘리트의 언어인 라틴어는 쓰지 않았다. 페브르는 이 시기 루터가 그리스도교 세계나 고향인 작센 지역이 아니라 오직 ‘독일’ 전체에 말을 건넸다고 보았다. 국가가 신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 루터는 점점 더 국가에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루터의 독특한 ‘국가관’과 ‘권력관’이 자리잡고 있다. 토마스 뮌처가 이끈 농민 전쟁에서 격렬한 반대자 목소리를 낸 루터는 1530년을 전후로 한 많은 글들에서 “국가는 신이 만든 제도”라는 명제를 장황하게 논증했다고 한다. 전적으로 신의 의사에 근거해 최초로 적법하게 인정된 실체, 제후들의 절대 권력을 갖는 주체가 국가뿐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미 1525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교육은, 교황이 전혀 하지도 못했고 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을 실현케 하는 권한과 권력을 세속의 지상권에 완전히 부여했다.”
루터에게는 모든 권력이 정당하다. 그가 세상사를 판단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은 신이었는데, 권력은 그 신의 의지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증스러운 폭군일지라도 가장 인자한 왕에게 하듯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폭군의 행위와 명령은, 신이 그것들을 그대로 원하고 허락한 것이다! 모든 제후는 신의 대리자다. 루터에게 그들은 “작은 신들”이었다.
루터는 “세상의 제후들은 신들이고 평민들은 사탄이다”라고 했다. “백성이 폭군에게 단 한 가지라도 부당한 짓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폭군이 백성에게 백 가지 부당한 짓을 하는 편이 더 낫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루터에게 국가는 절대선이었다. 그런 국가가 책임지는 교육, 그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아동들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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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브르는 루터가 근대사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를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비조처럼 여기는 것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동시에 페브르는 루터를 게르만 사회와 독일 정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권력에 복종하고 권위에 순응하는 독일인의 어떤 기질을 그렇게 표현할 것이 아닐까.
1933년 권력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가 5마르크짜리 은화에 16세기 초 독일의 ‘반항자’ 루터 초상을 새겼다. 히틀러가 세운 정당 ‘나치(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는 ‘국가’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루터를 교육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그의 교육철학적인 면모를 살피 때 참조해야 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