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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과 교육제도에 관한 담론에서 쓰이는 ‘언어’에 대해 말하고 싶다. 교육을 ‘개혁’하고 학교를 ‘혁신’한다고 한다. ‘전문어’처럼 쓰여야 할 ‘창의’, ‘비판’, ‘협력’, ‘소통’ 등의 단어가 무분별하게 쓰인다. 일견 ‘과잉 의미화’다. 많은 것,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학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언어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효율성과 신뢰다. 효율성은 ‘들인 대가나 노력에 비하여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능이나 성질’을 뜻하는 말이다. 비용을 증가시키지 않고 임금을 높이도록 하는 데 쓰이는 이른바 ‘과학적 경영론’ 같은 경제‧경영 분야에서 자주 사용된다. 말 자체가 교육과 어울리지 않는다.
신뢰는 ‘믿고 의지함’의 뜻이 있는 낱말이다. 교육 담론에서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다. 그런데 ‘믿고 의지함’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쓰는 사람에 따라 자의적으로 규정될 우려가 있어 보인다. 하나의 공동체나 조직 안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 관계가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뚜렷이 보장되는 합의된 시스템, 구조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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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 담론을 보자. 넬 나딩스(Nell Nadings)는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2016, 살림터)에서 오늘날의 교육정책을 특징화하는 언어가, 사회 전체적으로 비즈니스 담론이 지배적이게 되면서 진정한 교육에 반하고 있다고 보았다.
비즈니스는 특정 기간의 손실과 이익을 따지는 경향을 보인다. 교육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장기성, 불투명성이다. ‘효과’, ‘효용’, ‘효율성’, ‘성과’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이들 비니즈니 유형의 언어들이 교육 본연의 이미지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 비교적 단기간에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 학업 성취도조차 부모의 학력이나 가정의 경제‧문화적 배경에 따라 크게 좌우됨은 주지하는 바다.
교육에서 효율성이 부각되면서 나타나는 폐해는 이미 입증되었다.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교육정책과 정치 이론을 강의하는 마크 올슨(Mark Olssen) 정치학과 교수에 따르면, 효율성은 어떤 일이 그렇게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었다고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과 관련된다.교육사 연구자인 레이몬드 캘러핸(Raymond Callahan)은 <교육화 효율성 숭배(Education and the cult of effiency)>(1962)에서 미국 학교들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어떻게 점점 더 많은 기록과 보고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효율성은 쉼 없는 기록과 보고를 통해 계속해서 보여 주어야 했다. 교육 비용 회계는 일상이 되었다. 교사들은 매일 매 시간 설명하고 보고하도록 요구받았다. 행정가들은 보고와 정책 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매달렸다. 말할 것도 없이, 가르치는 일에는 더 적은 시간만을 쓰게 되었고, 학교는 따분하기 짝이 없고 의례적인 질서와 밋밋한 일이 반복되는 일상의 장소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학교는 교육적 의미에서 덜 효율적인 곳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학교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관리적 압제에 짓눌리고 무기력한 체제를 만들었다. 효율성 숭배는 결과적으로 교육 기관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입증된 관리주의를 숭배하는 일이 되었다. - 마크 올슨 외(2015),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계보와 그 너머>, 298쪽.
교육정책과 교육제도에서의 효율성 담론은 신자유주의 이론과 관련된다. 신자유주의 이론은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책무성과 점검을 강화함으로써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전체로서의 사회 체제에서 신뢰 관계와 사회적 자본을 좀먹는 관리주의 형식을 강화한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터를 잡고 있는 효율성 담론 역시 1911년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의 <과학적 경영의 원리(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에서 파생된 ‘과학적 관리론’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과학적 관리론이 가져온 효율성 담론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20여년간 학교 행정에 큰 영향을 미치며 맹위를 떨쳤으나 실패로 귀결되었다. 1930년대 존 듀이와 킬패트릭 등 진보적인 교육자들이 관리주의를 패배시키고 민주적인 교육 가치를 중심으로 미국 교육을 재구축하면서 효율성 숭배가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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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교육 담론에서 쓰이는 말들 중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공교육이 신뢰를 잃었다’, ‘학교와 교사가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 따위로 쓰인다. 학교와 교사 비판의 ‘보도’처럼 쓰인다. 다시 신뢰를 얻게 되면 모든 교육 문제가 해소될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어떤 신뢰여야 하는가.
뉴질랜드 연구자 시크(Schick)는 <개혁의 정신(The Spirit of Reform)>(1996)에서 공공 서비스의 가치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에서 오는 신뢰, 사익보다 중요한 의무감, 최선을 다하기 위한 전문가적 헌신 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마크 올슨에 따르면 신뢰는 관계적 개념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특정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태도나 성향이다.
이렇게 행동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은 공정성과 존중과 같은 원칙에 의존할 것이며 마침내 정직(또는 진실됨), 우정 그리고 보살핌과 같은 덕을 빚어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뢰는 삶의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매일매일의 사회적 상호작용과 실천으로 지지되는 공동체적 전통 안에서 신뢰를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는 점차 쇠약해지고 사라지게 된다. - 마크 올슨(2015),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계보와 그 너머>, 301쪽.
신뢰는 어떤 기관이나 사회적 조직에 축적된 특징으로서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중 하나다. 규범, 네트워크가 또 다른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요인인데, 신뢰는 이들보다 더 중요하다. 이 문제를, 미국의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과 그의 동료들이 이탈리아에서 지방자치가 시작된 1970년대에 연구를 개시해 20년 넘게 농업과 주택, 건강 서비스 분야에서 지방정부의 효과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 분석한 결과를 통해 살펴보자.
퍼트넘에 따르면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약한 사회적 조직이 있었다. 북부는 친족 관계가 아닌 ‘자발적 사회성(spontaneous sociability)’이라고 부른 것에 근거한 조직을 형성하려는 성향이 높았다. 자료 분석 결과 북부 지역이 시민 공동체가 형성되고 좋은 정부가 운영되며 경제적으로 번영했는데, 이는 신뢰와 협력, 상호성의 규범과 같은 것의 유형으로 촉진된 것이었다. 퍼트넘이 높은 수준의 사회적 자본으로 부른 요소들이 그 바탕에 있었다.
퍼트넘은 “(신뢰를) 가진 만큼 얻는다. 신뢰와 같은 대다수 사회적 자본은 허시먼이 ‘도덕적 자본(maral resources)이라고 부른 것인데, 다시 말해 사용하면 할수록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늘어나며, 사용하지 않으면 고갈되어 버리는 자본이다”라고 말했다. 신뢰가 신뢰를 낳고 불신이 불신을 낳는 순환구조가 이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마크 올슨에 따르면 신뢰는 협력의 기본 성분이자 생산성과 참여를 향상시키도록 유도할 수 있게 한다. 퍼트넘은 이탈리아에서 시민 참여가 활발한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사회적 신뢰가 경제적 역동성과 정부 활동을 지속시키는 정신 속에서 핵심 요소가 되어왔다고 주장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신뢰(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1995)에서 사회적 신뢰가 경제적 번영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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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올슨은 신뢰가 전문적 책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다. 전문가라는 도덕적 주체가 완전히 인정받는 전문가적 책무성 형식에 입각할 때 신뢰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신자유주의 담론에 속하는 외적 책무성 형식과는 의미 있게 다른 내적 책무성 형식을 함의한다고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전문가적 책무성’을 ‘전문가 책임주의’로 고쳐 부르겠다. 신자유주의 담론의 기초가 되는 ‘외적 책무성’은 ‘책무성’으로, 전문가 책임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내적 책무성’은 ‘책임성’으로 바꿔 명명하고자 한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외적 책무성과 내적 책무성 각각이 넬 나딩스가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에서 위계 구조의 ‘위로 향하는’ 책무성과 아래의 학생들로 향하는 책임성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서다.
[원출처: 코드(1999), <교육 개혁과, 책무성과 불신의 문화(Educational reform, accountability and the culture of distrust)> 참조. 마크 올슨(2015), 위의 책, 306쪽에서 재인용함.]
마크 올슨은 신자유주의적 교육‧공공부문 정책이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전문적 문화를 외적으로 부과되고 신뢰를 낮추는 책무성 형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고 보았다. 앤드류 브린(Andrew Brien)은 <전문적 윤리와 신뢰 문화(Professional ethics and the culture of trust)>(1998)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전문적 윤리와 관련하여 법률이나 강요된 규칙을 통해 윤리적 행위를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으로 성공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이 전문적 삶을 구성하는 바로 그 미덕으로부터 윤리적 행위를 분리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브린의 말을 좀 더 들어 보자.
이런 방법은 주체로서의 인간보다는 그들이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윤리적 규범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런 방책은 전문가가 된다는 것의 중요한 부분이 어떤 일에 특정한 방식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 마크 올슨(2015), 위의 책, 306쪽에서 재인용함.
책무성이 아니라 책임성을 강화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를 오노라 오닐(Onora O’Neill)의 논증을 통해 알아보자. 오닐은 2002년 영국 비비시 리스(BBC Reith) 강연에서 현대사회에서의 ‘신뢰의 위기’를 토론했다고 한다. 책무성 문화가 전문적 실제의 적절한 목적을 왜곡하며, 전문가들과 공중 사이의 신뢰를 더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오닐에 따르면 새로운 책무성 문화는 전문적 순수성보다 ‘통제’에 관한 것이다. 새로운 감사 문화(audit culture)가 전문가들과 기관들로 하여금 “누구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가, 무엇을 위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가”를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겉보기에 ‘공공’에 책임지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는 책무성 문화가 실질적으로는 규제자와 정부 부처, 재정 지원자와 법적 표준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책무성 양식이 서로 다르고 상호 일관되지 않은 중앙 통제 형식을 부과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상호 협의와 토론, 숙의에 따른 ‘교육적인’ 절차보다 기계적인 매뉴얼을 중시하는 ‘관료 행정적인’ 처리 방식이 학교 현장을 지배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마크 올슨은 두 가지를 제안했다. 교사들이 신자유주의적 책무성 의례를 실행할 수 있는 곳을 거부하면서 그들 자신의 고유한 개인적 실천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협력과 동료적 관계에 기초한 민주적 관리 모델을 증진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는 모든 교육기관 안에서 신뢰와 전문적 책무성(전문가 책임주의) 문화를 복원하는 일이 강력하고 번성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전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공동체와 민주적 정의의 가치에 대한 정치적 헌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위 글에 인용된 주요 연구 결과, 용어, 개념 들은 마크 올슨 외(2015),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계보와 그 너머>를 참고해 기술하였다.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로버트 퍼트넘이다. '다음 백과사전'(http://100.daum.net/multimedia/54_45100032_i1.jpg)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