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바림 (11)
1
나는 주사 맞기를 싫어한다. 학교에서 ‘불주사’로 통칭되던 예방주사를 맞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날, 나는 교실에서 일부러 최대한 늦게 나왔다. 주사를 맞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선 동무들 뒤에 가 있다가 다른 반 아이들이 언제 오나 뒤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내 차례는 여지없이 왔다.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거린다. 눈을 질끈 감으며 팔을 내민다. 주사기를 잡은 간호사의 차가운 손놀림이 궁금해진다. 눈을 살짝 떠 쳐다보려다 다시 눈을 감고 만다. 이어지는 시리면서 따가운 일침! 눈끝이 파르르 떨린다.
2
나는 약에 대한 믿음(?)이 별로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건강한 편이었다. 약을 먹을 만큼 크게 앓아본 적이 없다. 몸이 조금 안 좋아 약을 먹더라도 크게 좋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착각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 항용 찾아오기 마련인 감기조차 심하게 앓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지독한 감기는 대학교 2학년 초겨울에 걸린 것이었다. 며칠 자취방에 앓아누워 수업을 빠지자 동기들이 귤 봉지를 사들고 찾아왔다. 속내의 차림으로 일어나 귤 몇 개 까먹은 뒤 벌떡 일어났다. 그때도 약은 먹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3
언제부터인가 주사 맞기가 싫지 않게 되었다. 몸이 조금만 아파 오면 동네 의원을 찾아 주사를 맞고 약을 지어 먹는다.
10여년 전 폐결핵을 앓았다. 박사학위논문을 탈고하고 졸업식을 마친 직후였다. 별 볼 일 없는 주제를 붙잡고 수년간 속을 썩인 몸과 머리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멈추지 않는 기침이 이상했다.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고 폐결핵 확진 판정을 받았다.
면역력이 거의 바닥에 이르자 폐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부랴부랴 병가를 내고 보름 정도 입원 격리 치료를 받았다. 1년간 빠짐없이 결핵약을 먹었다. 당시 만 세 살이 안 된 큰딸도 같은 약을 반 년여 동안 먹어야 했다. 면역 시스템이 불완전한 어린 나이였다. 아이에게 한업이 미안했다.
약을 제대로 먹은 덕분인지 1년이 지난 뒤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결핵 경험 이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감기에 걸리는 횟수가 잦아지고, 한 번 감기에 걸려 멈출 때까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이었다.
결핵 경험의 ‘트라우마’에 따른 영향인지 모른다. 감기에 걸리고 기침을 하면 지레 결핵부터 떠올린다. 그런 걱정을 사서 하다 보니 스스로 적극적으로 병원을 찾고 약국을 가게 된다. 속으로야 어찌되었든 그렇게 싫어하던 주사도 시원하게 잘 맞는다.
4
학년 초에 독한 감기에 걸려 혼쭐이 났다. 차분하게 새 학년을 준비해야 할 2월말에 장거리 몇 군데를 오가는 강행군을 치른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즈음 다시 감기에 걸려 끙끙 앓고 있다. 어제는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일찍 집으로 왔다. 오늘 있었던 우리 학교 전교조 분회 조합원 선생님들과의 모임도 빠졌다. 멋진 대천 바닷가에 가서 회를 먹으며 친목을 돋우는 자리였다! 학교에서 몸이 아프다고 조퇴하고, 모임에 빠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 내 걱정의 ‘핵심’이다.
약을 지어와 이틀째 먹고 있는데도 기침과 오한이 가시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일까.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후과일까. 이른 오후부터 저녁까지 내내 잠에 빠져 있다 일어난 잠자리가 내내 뒤숭숭했다.
5
오늘 점심 무렵이었다. 멋진 분회 모임에 빠지게 되어 맥없이 앉아 있는 내게 친한 동료 선생님 한 분이 떨어진 면역력을 보충하는 데 ‘코딱지’, 정확히 말하면 코딱지에 들어 있는 ‘뮤신(Mucin)’ 성분이 즉효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십성 ‘가짜뉴스’인가 싶어 검색해 보니 기사 분위기(?)가 진지하고, 여러 신문에 제법 비중 있게 실려 있었다. 하버드니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이니 하는 유수한 대학 연구진이 등장했다. 코딱지에 포함된 당단백질의 일종인 뮤신이 신체 면역력을 향상시켜 건강을 증진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딱지에 들어 있는 소량의 세균과 박테리아가 우리 몸에 침투하여 일종의 ‘예방 접종’ 구실을 한다는 것.
몸이 안 좋아서일까. 콧속을 더듬어 보니 파먹을(?) 만한 먹음직스러운 코딱지조차 하나 없다. 몸 상태가 이대로 간다면 내일쯤 ‘불주사’가 아니라 ‘화산주사’라도 맞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눈부신 봄날이 야속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