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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pr 27. 2017

장모와 전기 믹서기

적바림 (10)

1     


큰아이가 수학여행을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둘째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장인 장모께서 오셨다.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전기 믹서기가 안방 화장대 아래에 있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물건이다. 이상하게 여겨 장모님께 여쭈었다.     


“믹서 소리에 자네 깰까 봐….”     


장모님은 우리 집에 오시면 아침에 이런저런 야채나 과일을 믹서기로 갈아 주스로 내놓으신다. 나는 평소 부엌으로 바로 통하는 거실에서 잠을 잔다. 전기 믹서 소리는 요란하다. 사위의 달디 단 아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장모님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마음이 울컥해졌다.     


2     


외할머니께서는 말년을 우리 집에서 보내셨다. 외삼촌 한 분이 계셨으나 일찍 돌아가셨다. 수양아들을 하나 두셨지만 의지할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외할머니는 당신 친정 동네서 수년 동안 보내시다 늘그막에 기력이 쇠해지시면서 우리 집으로 오셨다.     


사위집에 얹혀 사는 일이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초등학교 3학년이나 4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옆구리에 허름한 보퉁이 하나 끼고 집 고샅을 들어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감꽃이 막 떨어지기 시작하던 오월 어느 날이었다.     


노인네라지만 ‘입’이 하나 느는 일이다. 흥부네처럼 자식들이 올망졸망 붙어 있는 집이었다. 가난한 아버지에게 외할머니는 묵직한 한숨처럼 다가오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외할머니께 대체로 무뚝뚝하셨다. 그러나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오일장에 가시면 외할머니 좋아하시는 고등어며 갈치를 사오실 때가 많았다.     


외할머니는 시린 겨울에 돌아가셨다. 조문객들로 부산스러운 마당 한켠에 아무 말씀 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3     


며칠 전 장인 장모님은 버스로 오셨다. 옷가방 말고도 큼지막한 보따리가 함께했다. 그 안에는 갓 캔 돌미나리와 취나물 등속이 담겨 있었다. 멀리 함평까지 가서 캐셨다고 한다. 나물 좋아하는 사위 챙긴다며 가져오신 것일 게다.      


어제 저녁 장모는 일찍 퇴근한 아내와 함께 어판장에 가서 낙지를 사와 맛난 초무침을 해주셨다. 요며칠 독한 몸살감기로 끙끙 앓던 몸에 기운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장인 장모님께 어떤 사위일까. 당신들이 늘그막에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러신 것처럼 때때로 맛난 것 챙기는 살뜰함을 내보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서지 않는다.      


사위 잠에서 깰까 저어하며 전기 믹서기를 안방으로 이사시킨 당신들의 애틋한 마음이 내내 가시지 않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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