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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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힘드시죠?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 좀 내려 놓으세요. 마음속 빗장도 좀 푸시고요. 아이들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초등 교사로 지내시는 분이 언젠가 그러더군요. 교실에서 노는 저학년 아이들 보면 원숭이 풀어놓은 것 같다고요. 아이들 얕잡아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야단법석으로 노는 게 응당 자연스럽다고요. 열네댓 살 먹은 중학생도 비슷합니다.”
2
선생들은 ‘질서’와 ‘규칙’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착하다’, ‘얌전하다’라는 형용사를 상용한다. 학생이 갖추어야 할 (것으로 기준처럼 각자 정해 놓은) ‘예의범절’을 중시한다.
선생들 자신이 대체로 그렇게 자라서 그런 것일 게다. 요컨대 선생들은 학생 시절 질서와 규칙을 존중하면서 착하고 얌전하게 자란, 깎듯이 예절을 지키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산 ‘모범생’이었다.
3
오늘 아침 조회 시간에 ‘경계’를 이야기했다. 요며칠 몇몇 선생님들로부터 우리 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수업 중에 힘들게 하는 학생들이 몇몇 있었나 보다. 말을 하고 동작과 행동을 취하되, 수업 사이사이 경계를 잘 세워 반 전체의 수업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즈음 들어 경계 말하기가 세 번째쯤 되는 것 같다.
중학생들이니 ‘제도권’ 학교의 규율과 수업 중 지켜야 할 보이지 않는 규칙을 6, 7년 경험했다. 그래도 어떤 학생들은 경계 세우기를 힘들어 한다. 이 선생님 앞에서는 이 말과 동작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저 선생님 앞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학생은 혼란스럽다.
각자 크기나 수준이 다른 ‘야생성’과, 속도나 깊이가 다른 변화(성장)의 과정과 결과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기 어렵다. 선생이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몇몇 ‘특별한’ 학생들이 힘들어 한다. 엇나가기 시작한다.
4
몇몇 학생 때문에 전체가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되겠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당연히 안 된다. ‘특별한’ 몇몇의 상궤를 벗어난 말과 동작과 행동은 단호히 제지해야 한다.
다만 거꾸로 이렇게 묻고 싶다.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특별한’ 학생들 몇몇을 ‘표적’ 삼아 주시하고 훈계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은 그들 몇몇에게 부정의 낙인을 찍은 결과는 아닌가.
잔뜩 풀이 죽어 움츠리고 긴장한, ‘왜 나만 갖고 그래’ 하는 식의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선 ‘몇몇’을 보다 살짝 ‘빡치며’ 쓰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