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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y 24. 2017

“가장 아름답고 슬픈 결혼식”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곡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하여

1

    

요며칠 학생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고 있다. 기분이 묘하다. 정권 교체 뒤 바뀐 세상 공기가 이런 것인가 싶다.    

  

어제 한 모임에서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자기 검열’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5.18 즈음이 되면 계기수업을 했다. 소심한 걱정거리들이 많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학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거의 ‘금지곡’처럼 여겨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수업 시간에 함께 들어도 되는지 갈등하다 그냥 넘어갈 때가 있었다.     


대통령이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세상이 되었다. 팔뚝질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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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은 후대에 의례적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기념곡이 아니다. 탄생 배경에 5.18 광주민주화운동(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극적인 삶과,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고 슬픈 결혼식”이라고 부르는, 시민군 지도자 윤상원과 광주 ‘들불야학’ 교사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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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들불야학 1기에 참여해 사회 교사로 활동했다.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최후까지 시민군을 이끌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박기순은 전남대 사범대학 학생이었다. 오빠 박형선이 윤한봉의 누이동생 윤경자와 결혼하였는데, 전남대 농과대 복학생이었던 윤한봉과는 학교 선후배인 동시에 사돈지간이었다.     


윤한봉은 당시 광주 지역 대학생들 사이에서 민주화운동 최고 선배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5.18 발발 즈음 여러 우여곡절 때문에 시민군에 끼지 못하게 되는데,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자리에 자신이 있었어야 함에도 후배 윤상원이 대신했다는 생각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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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은 박기순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평생 부채감을 안고 살았다.


1978년 성탄절이었다. 윤한봉은 전남대 의과대 앞 골목 허름한 자취방을 빠져나와 여동생 윤경자 부부가 사는 집으로 갔다. 자취방에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오랫동안 연탄불을 때지 않은 방에 연탄불을 피우자 치명적인 연탄가스가 나왔다.

    

윤경자 부부는 큰방과 작은방이 나란히 붙은 작고 오래된 집에서 살았다. 윤경자는 자정이 다 되어 찾아온 오빠를 이틀째 비어 있던 작은방에서 자게 했다. 박기순이 쓰던 방이었다.    

  

박기순은 윤상원 등과 함께 들불야학 수학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 박기순은 들불야학 난로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오후 내내 동료들과 손수레를 끌었다. 일을 마치고 추운 강의실에서 잠을 자려고 했으나 몸살 기운이 있어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와 있던 윤한봉은 박기순에게 방을 내주고 동생 부부 방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이었다. 윤경자가 작은방 문을 두드리며 일어나라고 했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이상한 예감이 든 윤한봉이 방문을 열었다. 박기순이 문 쪽에 엎어져 있었다. 급히 둘러엎고 병원을 향해 달렸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겨우 21살이었다.  

   

윤한봉은 그날 박기순 대신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박기순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먼저 작은방을 차지하고 있던 자신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믿기 힘든 공교로운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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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박기순과 윤상원은 연인 사이였다. 두 사람의 슬픈 사연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지에 모였다.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즈음 윤한봉은 미국으로 밀항해 미국 시애틀의 잡화점에서 일하면서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은, 윤한봉이 잡화점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 울며 꽁초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일이었다.


시린 늦겨울에 치른 그 슬픈 영혼 결혼식에서 한 노래가 불렸다. 민주화운동 지도자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소설가 황석영이 개사하고 전남대 학생 김종률이 곡을 붙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 뒤 5.18 기념곡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애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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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이 정부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 이후 5.18 기념식의 공식 기념곡으로 불렸다. 행사 기념곡이었으므로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는 ‘제창’ 형식이었다. 이명박 정권 집권기인 2009년부터 ‘합창’ 방식으로 바뀌어 박근혜 정권 집권기인 지난해까지 이어졌다. 5.18을 폄하하여 반쪽짜리로 만들기 위한 그들만의 졸렬한 꼼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난 주 열린 제37주년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통령을 비롯해 참석자 전원이 부르는 제창 방식으로 널리 울려퍼졌다.


7


카메라에 잡힌 문재인 대통령의 눈시울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의 가슴 또한 먹먹함으로 젖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부끄러운 ‘자기검열’ 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윤한봉, 윤상원, 박기순 등에 관한 일화는 윤한봉 평전 <윤한봉>(2017, 창비) 298~301쪽을 참고해 정리하였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임을 위한 행진곡> 악곡이다. <서울신문>(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518500017&wlog_tag3=daum)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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