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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13. 2017

연필

적바림 (15)

1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내 손때가 묻은 연필을 손에 쥐고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연필이 탄생시킨 밑줄과 메모들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책장을 보고 있으면, 책을 읽으며 생각의 타래를 펼쳐 나가던 그 모든 시공간이 오롯이 떠오른다.     


내게는 필통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평소 매고 다니는 가방에 들어 있는 개인용 필통이다.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일을 하거나 수업을 할 때 쓰는 업무용(?) 필통이다. 두 필통 모두에 연필 한두 자루를 구비하고 다닌다. 평소 아껴 쓰던 연필이 필통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마음이 수선스러워진다.     

2     


교실에 수업하러 다니다 보면 종종 주인 잃은 연필이 눈에 띈다. 그 자리에서 주인을 수소문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나는 연필을 조용히 필통에 집어 넣는다.     

 

교무실로 돌아와 연필을 찬찬히 훑어본다. 삐뚤빼뚤 거칠게 깎인 모습이 안쓰럽다. 필통에서 칼을 꺼내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로 쥔다. 연필은 오른손 엄지와 중지 위에 살짝 올려놓은 듯 쥐어준다.    

 

칼날을 연필에 댄 뒤 오른손 검지로 칼날집을 아래로 민다. 연필 심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껍질이 둥그렇게 말리며 깎여나간다. 나무가 쇠에 밀리면서 내는 소리가 부드럽게 서걱인다. 곧 둥근 원뿔이 연필 심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모양이 만들어진다.      


나는 연필을 바닥에 세운다. 왼손가락에 힘을 적당히 주면서 칼질을 시작한다. 연필 심의 끄트머리를 적당한 정도로 뾰족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칼이 심에 가 닿는 각도, 오른손으로 쥔 연필이 세워진 각도와 그것을 회전시키는 속도 등이 종합적으로 맞아떨어져야 완벽한 원뿔이 만들어진다.  

   

3     


나는 이런 연필을 좋아한다. 연필 심이 적당히 부드러워야 한다. 글씨를 쓰거나 선을 그을 때 시종일관 매끄럽게 움직이면 좋다. 심이 좋지 않으면 글자 획이나 선이 균질하지 않게 된다.     


연필 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가 좋은 원목이어야 한다. 조잡한 폐목(閉木) 조각들을 압착해 만든 나무를 사용해 만든 싸구려 연필들이 많다. 깎을 때 나는 서걱임 소리가 좋지 않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 닿으면 나무가 제멋대로 깎여 버려 완벽한 원뿔을 만들기 어렵다.     


연필 위쪽 끝에 달린 지우개 품질이 좋아야 한다. 재질이 뻑뻑하여 쓰다 보면 종이를 상하게 하는 지우개, 몇 번 쓰면 시커먼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시 공책이나 책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지우개는 좋지 않다.

    

나무 겉에 무늬가 없고 색깔이 단색이면 좋다.     


4     


나는 연필을 책을 읽을 때 쓴다. 문장에 밑줄을 긋거나, 큰 문단을 표적 삼아 크게 동그라미를 치거나, 별표나 화살표 따위 기호를 표시하거나, 난외 여백에 단상 메모를 적어 넣을 때 연필을 굴린다.     


책을 읽을 때는 꼭 연필을 구비해 놓아야 한다. 연필이 곁에 없으면 마음이 헛헛해진다. 눈으로 행간의 문장들을 뒤쫓지만 그것들이 머리와 가슴에 쉬이 와 닿지 않는다. 손에 연필을 쥐고 있거나, 책 옆에 연필이 한 자루 놓여 있으면 그렇지 않다. 책을 읽는 시공간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집중력이 분출한다.     


5     


연필을 쥐고 느긋하게 책을 읽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다. 다가오는 여름방학에는 좋은 연필 한 자루와 수권의 책이 든 책보따리를 들고 깊은 산 속 절간에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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