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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떤 출장 일을 마치고 참석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미래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미래교육’에 대해 꽤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는 젊은 선생님이 대화 상대였다. 미래교육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이 비슷해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미래교육에 관한 한 ‘사기’나 ‘헛똑똑이’들이 자주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누군가는 ‘위험한’ 태도로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는 언론 보도나 미래학(?) 책들에 등장하는 미래 유망 직업(직종)에 관한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짐작컨대 10년이나 20년 전쯤에 나온 미래 유망 직종표를 현재 상황과 견줘 보면 맞지 않는 구석이 많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어느 출판사에서 논평을 부탁한 원고에서 미래교육에 관한 심도 깊은 담화를 만나 공감하며 읽었다. 가령 교육불평등이나 교육을 통한 계층 고착화 같은 더 중차대하고 시급한 교육의제들이 넘쳐나는 현실 속에서, ‘제4차 산업혁명’과 같은 미래 담론이 교육과 관련한 공공 담론 영역을 쓰나미처럼 몰아치고 있다고 비판하는 대목 등이 특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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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쯤 ‘역량’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면서 교육판을 온통 휩쓸었던 기억이 난다. 역량이라는 말은 이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에까지 들어가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역량이 실린 대목을 보면 예전의 ‘(사고)능력’이 ‘역량’으로 바꾸었을 뿐임을 알게 된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어느새 역량은 화석화한 고대어의 잔존물처럼 보인다. 역량은, 법적으로 고시된 교육과정 안에 활자로나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어떤 역사적 연원과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출현했는지 아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때 뜨거운 유행어가 되었을 때 그 의미를 차분하게 성찰하는 분위기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솔직히 나도 ‘유행어’ 쓰듯 그 말을 자주 썼다.)
‘학생 중심 교육’이라는 말 또한 그렇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이 말에 담긴 취지와 지향점에 동의한다. 다만 나는 학생 중심 교육(의 방법)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학생 중심 교육을 말하면서 교사를 단순한 ‘지원자’나 ‘조력자’로 간주하거나, 교실 내에서의 교육활동을 천편일률적으로 ‘모둠’이니 ‘토론’이니 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 들이 그렇다.
모둠과 토론 모두 훌륭한 수업 방식이고, 나 또한 그 방식들을 때때로 활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학생을 ‘중심’에 놓는 방식이 학생의 모둠 ‘활동’이나 토론 ‘활동’ 등에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제식 수업 형태에서 교사가 던지는 통찰력 넘치는 ‘질문’이나 ‘설명’ 한 마디가 학생 모두가 (비록 홀로지만) 시공간의 ‘중심’에 서는 훌륭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학생 중심 교육에 중점을 두자는 구호가 유행처럼 번지자 촌극의 한 장면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평소 모둠형 협력 수업이나 토론 활동에 관심 없는 선생님이 공개수업 시간이 되면 모둠 대형을 만들어 수업한다. 다음 시간 수업을 예고하면서 모둠 이야기를 꺼내면 얼떨떨해진 아이들이 먼저 눈치 채고 “선생님, 내일 공개수업 하죠?”라며 살짝 조소 섞인 질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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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유행어’라는 유령이 학교와 교사를 휘두르고 있다. 학생 눈높이 수업, 배움의 공동체 수업, 수업비평, 아이 눈으로 수업하기, 거꾸로 수업, 하브루타 수업 등등 수많은 교육 유행어들이 학교 현장을 휩쓸고 다닌다. 여러 유행어가 명멸할 때마다 수많은 ‘정답’들이 교실과 교사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러다 언제나 그래왔듯 유행에 둔감해지고 외부에서 강요하는 ‘정답’에 지치고 신물이 난 교사들은 옛날로 돌아간다.
착하고 성실한 교사들은 한철 교육 유행어에 쉽사리 휘둘린다. 교사들이, 튼실한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나’만의 고유한 교육활동을 실천하면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둥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미래 교육이니 역량 중심 교육이니 학생 중심 교육이니 하는 것들을 계획하고 실천할 때 깊이 고민해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