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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과 저녁에 연달아 모임과 회의가 있었다. 아내는 또(!) 부서 회식을 한다며 문자로 알려 왔다. 점심 모임에 먹고 남은 탕이 있어 포장해 달라고 했다. 마땅한 찬거리가 없어 그것으로 아이들 저녁을 챙겨줄 요량이었다.
6시 30분에 시작하는 회의 시작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들어섰다. 탕을 냄비에 옮겨 담아 불 위에 올리고, 번철에 계란 세 개를 깨 넣어 프라이를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김자반 무침과 깻잎 장아찌 등 밑반찬을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나는 한 갈래 목구멍 길로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눌러 삼켰다. 자식 새끼들 한 끼 챙기는 ‘일’의 귀함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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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일요일이 되면 어머니 손길이 분주해지셨다. 이맘때 철이면 고춧가루 양념을 엷게 버무려 만든 배추김치를 챙겨 주시곤 하셨다. 집 앞 텃밭에서 잘라 온 부추를 다듬어 매운 고춧가루와 쿰쿰한 멸치액젓 양념에 무친 부추김치도 단골 반찬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반찬통들을 가방과 보자기에 고루 나누어 담아 주셨다. 묵직한 그것들을 매고 들어 대문께를 나설 때 나는 마음이 심란하고 묵직해졌다. 며칠만에 물큰해질 배추김치와 군내 폴폴 풍겨낼 부추김치가 그려졌다. 그 애틋한 반찬들의 힘으로 버텨내야 하는 한 주가 마치 한 달이나 일 년이나 되는 것처럼 지레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 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김칫거리를 다듬은 어머니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때서야 나는 발걸음을 부러 힘차게 내저으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해였다. 힘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저녁밥을 먹으러 터덜터널 자취방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와 계셨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고막무침과 호박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함께 상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버스 차창을 내다보며 먼 길을 오셨을 늙고 초라한, 그러나 자식 새끼 밥상 맛나게 차려줄 생각에 살짝 들뜨기도 하셨을 어머니의 경건한 모습이 그려졌다. 목이 메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께서는, 홀로 끼니 챙겨가며 공부하는 자식 새끼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챙겨주어야겠다며 자취방행을 ‘감행하신’ 그 해 여름날의 일을 지금도 자랑스레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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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언주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가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표적 삼아 던졌다는 ‘막말’을 들으면서 절망했다. 아이들 먹일 한 끼 밥을 챙겨주기 위해 위험한 압력솥 앞에서 밥을 짓고 뜨거운 기름과 물이 끓는 솥을 다루는 그 분들이, 그의 눈에 함부로 대해도 되는 별것 아닌 ‘별종’으로 보였던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가 한 나라의 국회의원으로, 제3당의 고위 당직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우리 사회 상층을 이루는 ‘귀족’들이 평범한 시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수한 사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민중은 개나 돼지”라며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라고 말해 대다수 국민을 축생으로 만든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을 떠올려 보라.
지난 6.30 사회적 총파업 즈음에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일부 교사들도 내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전향적인 법령과 절차에 따라 정규직으로 바꾸자고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세상이 교사 집단을 만만하고 우습게 보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교사 집단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처럼 보는 그런 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교사들을 만만하고 우습게 보는 우리 사회 일각의 생각이 외부에 있는 저 노동자들의 문제 때문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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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서는 대학 교수와 배관공 급여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최근 어느 글에서는 개방 이전 시기였던 1970년대 말 중국에서 대학교 교수보다 거리 청소를 하는 환경미화원이나 택시를 모는 운전기사 급여가 더 많더라는 내용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목하 화두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나 ‘직무급제’와 같은 노동 관련 쟁점들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 전에 나는, 가령 대학 교수와 배관공과 환경미화원과 택시 기사와 교사가 하는 일에 대한 핀란드나 중국 사회의 어떤 ‘시선’을 상상한다.
자식 새끼 위해 밥 한 끼를 준비하거나,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먹일 급식을 마련하거나,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거나 하는 일 모두 우리 사회를 유지해 가는 데 필요한 귀한 ‘노동’들이다. 우리는 지금 ‘사람’과 ‘일’에 관한 어떤 굳은 생각에 가로막혀 새로운 ‘상상’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무료 이미지 제공 사이트인 'pixabay.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