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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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한 대목이 여기저기 자주 보인다. “기회는 균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즈음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가 급부상하면서다.
이런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을 ‘능력주의적 정의론자’라고 지칭해 보자. 나는 능력주의적 정의론자들이 내놓는 말과 글의 행간 사이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체를 ‘금기시’하려는 일련의 흐름을 본다.
가령 능력주의적 정의론자 교사는 비정규직 교사 직종이 여럿이고, 이에 따라 문제 해결의 방향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정규직화의 대상, 방법, 절차 들에 대한 논의를 쉽게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토론을 말하지만 차분한 대화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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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취임사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되어 있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능력 위주 사회에서는 기회가 균등하다고 해도 타고난 재능 덕에 자격 없는 사람이 남보다 앞서거나 보상을 받는다. 노력이나 노동윤리도 수없이 다양한 가정환경에 좌우된다. 가정환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학교 교수의 강의 한 토막을 보자. 세계 최고 명문인 이곳 대강당에서 학생 수백 명이 샌델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그는 심리학자들이 형제간 출생 순서에 따라 노동윤리와 노력이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이 문제를 두고 몇몇 학생과 토론을 주고받는다.
문득 샌델 교수가 “학생 중 첫째 손들어 보세요.”라고 말한다. 첫째로 태어나면 집에서 관심의 중심에 놓이면서 여러 지원과 격려와 애정어린 질책을 두루 받아 ‘능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샌델 교수는 세계 최고 우등생들인 하버드대 학생들 역시 그렇게 타고난 배경 덕분에 높은 성취 결과를 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샌델 교수의 말에 대다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곧 논쟁이 종료되었다.
이런 사례도 있다. 최고 중 최고로 구성된 엘리트 하키팀이 있다고 하자. 태어난 달을 기준으로 선수들의 월별 분포도를 정리해 보면 1~3월이 40퍼센트, 4~6월이 30퍼센트, 7~9월이 20퍼센트, 10~12월이 10퍼센트로 나타난다. 어떤 팀이든 예외가 없다고 한다. 캐나다 심리학자 로저 반즐리가 밝혀낸 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연령대를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분류해 차별적으로 대하게 되면 특정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집중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른 나이에 누가 잘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가를 결정한 뒤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경험을 하게 해 주면 특정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큰 이득을 누리는 편향성이 나타난다. 그 결과 경험과 이득의 빈익빈부익부가 재능의 다과로 이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편향된 결과가 교육과 같은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연말에 태어난 자녀를 둔 부모의 고민은 이듬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철없는 부모의 지나친 걱정이 아니다.
연초에 태어난 아이가 누리는 아주 작은 이익은 연말에 태어난 아이가 겪는 불이익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이어진다. 연초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연말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발육이 몇 달 더 이르게 진행되므로 덩치가 좋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구사할 수 있는 힘과 감각 능력 들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른들이 보기에 그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취감과 낙담, 용기과 좌절이 일종의 패턴이 되어 되풀이되면서 연초에 태어난 아이들과 연말에 태어난 아이들 각각에게 수년간 영향을 준다. 성취감과 용기의 선순환, 낙담과 좌절의 악순환처럼 말이다. 결국 아이들 사이에 현격한 능력의 차이가 나타난다.
본질적으로 기회의 균등은 이상론에 기반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는 것으로 기회의 균등을 이루었다는 보는 식의 기계적인 균등론은 복잡미묘한 현실의 다양한 사태들을 호도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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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는 어떨까. 기회의 균등론이 이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 이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이 과정의 공정이나 결과의 정의 시스템이다.
현실은 온갖 비합리적인 경쟁 구도의 지배를 받는다. 과정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불공정한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러니 다 똑같은 조건이다.” 엄청난 왜곡이다. 오찬호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밝힌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이십대 대학생들은 이 사회에 깊게 침윤된 자기계발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일종의 ‘피해자 탓하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경쟁에서 밀려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얽혀 있다. (중략) 그렇다면 사회는 출발과 과정의 공정성에 차별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결과의 차별’을 통해서라도 충분히 보상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 오찬호(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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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사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어떤 목소리인가다. 유감스럽지만 앞서 말한 능력주의적 정의론자 교사 유의 목소리는 아니라고 본다.
지금 나는 일반 시민들이 교사 집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다양한 해법을 함께 모색하면서 비정규직 직종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기 권익만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집단처럼 비쳐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지나친 걱정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교사들의 노동조합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이다. 나는 노동조합의 본질적인 지향이 ‘나’의 권익을 배타적으로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익을 함께 지키기 위한 싸움에 있다고 본다.
지금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학교비정규직 문제는 그 책임이 정부에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적인 책임 주체 또한 정부여야 한다. 이 명백한 사실들이 뒤로 감춰진 채, 학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휘발성’ 강한 문제가 ‘노-노 갈등’처럼 펼쳐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함께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보아 교사뿐 아니라 우리 교육 전체를 살리는 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