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58)
1
“섹스하고 싶다.”
단 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그간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일생을 앞당겨 상상한 뒤 자신의 묘비명에 남기고 싶은 문구를 써 보는 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짐작하건대 교실 분위기가 자차분하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연필을 들고 묘비명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학생들은 처음에 장난처럼 생각을 펼쳐가다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며 점차 머릿속이 묵직한 감정들로 채워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이 한 문장이 만들어졌다.
나는 이 문장을 쓴 중학교 1학년 학생인 정희(가명)의 심리를 짐작해 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냥 장난으로 썼을까. 그랬을 것 같다. 근엄한(?) 묘비명에 ‘섹스’를 써넣어야 할 정도로 섹스에 대한 관심이 큰 상태였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1차 성징을 막 지난 14살짜리에게 섹스는 그 자체로 뜨거운 호기심의 대상이다. 나는 동료 선생님에게 이 문장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정희가 어떤 이유에서 글을 썼든지간에 ‘솔직한 학생이구나’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어깨동무’라는 이름으로 학년문집을 위한 글쓰기 활동을 실시했다. <어깨동무>라는 제목을 써 넣은 글쓰기 공책을 학급별로 마련해 학급당 하루에 한 명씩 글을 한 편씩 쓰는 활동이었다.
준수(가명)가 글을 쓸 차례였다. 며칠간 공책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깨동무 글쓰기 활동에 거부감을 강하게 내보인 학생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준수를 복도로 불러냈다. 어깨동무 글쓰기 활동의 취지와 의미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준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안 쓰면 안 돼요? 안 쓰면 저 어떻게 돼요?” 두 마디를 되풀이했다. 물음 형식을 빌렸지만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억지로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게 했는데도 준수는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몇 번 더 어겼다. 어르고 달래면서 몇 차례 더 실랑이를 벌였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준수가 어깨동무 공책을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다. 두 개의 짤막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괴발개발 휘갈겨 쓴 네 줄짜리 자기소개 같은 글이 담겨 있었다.
“나는 중 2다.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준수가 글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2학년 교실과 교무실에 조그마한 술렁거림이 일었다. 준수는 한사코 글을 쓰지 않는 학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학생이 손 끝에 힘을 주어가며 짧지만 완성된 한 편의 글을 써서 제출했다. 뉴스거리가 될 만했다.
나는 그다음 수업 시간에 준수 글에 대해 촌평해 주었다. 군더더기 없는 짧은 문장이 돋보였다는 점,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는 글쓰기 태도가 인상적이었다는 점 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넌즈시 준수의 얼굴을 살폈다. 칭찬 받는 사람 특유의 흡족함과 겸손함이 표정에 담겨 있었다. 그런 준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2
학생들과 함께 글쓰기를 자주 하는 편이다. 학습지나 활동지를 만들 때 학생들이 직접 길거나 짤막한 글을 쓸 수 있는 활동 내용을 꼭 집어 넣어 구성한다. 활동이 끝난 뒤에는 각자 쓴 글을 모둠원들이나 학습 짝과 함께 돌려보고 각자 짤막한 논평 글을 쓰게 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서 생각과 감정의 다양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다. 동일한 주제를 놓고 서로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채워 놓은 글을 읽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글쓰기를 즐거운 일로 여기고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수업 시간에 글쓰기 활동을 안내하면 “아아, 선생님, 글쓰기 힘들어요.”, “또 글쓰기예요?”라면서 볼멘소리를 쏟아내는 학생들이 있다. 한 시간 내내 문장 하나 완성하지 못하고 연필만 굴리다 마는 학생들도 있다.
한편에서는 이런 현실이 학생들의 독서 시간 부족이나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 학교교육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이해한다. 일부 그런 면이 있다. 학생들이 책을 충분히 읽지 않으니 글이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 힘들다. 그 어떤 공부나 연구도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학생이나 교사 모두 글쓰기를 국어 교과만의 특유한 활동이라고 여긴다. 글쓰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글쓰기를 어려워하거나 힘들어하는 것은 학생 집단 사이에서만 특유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 어른들이 청소년들보다 책을 더 적게 읽고 텍스트 문해력도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오는 ‘진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학생들보다 더 글쓰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 안팎을 둘러보면 학생들의 글쓰기 교육을 일상적으로 담당해야 할 교사들 중에도 글쓰기의 어려움을 강하게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상당수 학생들이 글쓰기를 힘들어 하거나 흔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글쓰기를 싫어한다고 지레 결론을 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떤 조건 아래서 그들은 매우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글을 쓴다. 억지로 꾸미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각자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평범한 교사나 부모들에게 ‘깜놀’ 문구처럼 다가올 정희의 “섹스하고 싶다”라는 묘미병은 얼마나 진솔하고 참신(?)한가. 짤막한 자기소개 글로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내친 준수의 사례는 주변 사람 모두에게 극적인 경험의 기억으로 남았다. 준수 자신의 가슴에도 강렬한 체험으로 남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평소 교실에서 학생들과 글쓰기 활동을 할 때 ‘각자의 언어론’을 강조한다. 나는 학생들이 단 한 문장을 쓰더라도 자기 자신의 언어를 살려 쓰라고 힘주어 말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쓰는 언어의 색깔이 문장에 그대로 담기게 쓸 것을 주문한다. 어른들의 말이나 세상의 언어를 모방하듯 쓰지 말라는 의미에서다.
지난 겨울 방학 때 경험한 일이 떠오른다. 연초 며칠간 지역 청소년운동단체에서 청소년 8명과 함께 ‘사회적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역 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신분의 청소년들이었다. 첫 만남 자리에서 각자 품고 있는 글에 대한 생각과 그간의 글쓰기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를 듣고 나눠보니 글이나 글쓰기에 대한 청소년들의 흥미나 관심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 같았다. 서로 대화를 나눈 끝에 지정 주제(‘법과 규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자유 주제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
몇몇이 지정 주제에 대해 글 쓰는 것을 힘들어 했다. ‘법’이나 ‘규칙’이라는 추상적 관념어들이 주는 딱딱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정 주제를 놓고 글을 쓰는 일이 힘들면 자유 주제 글쓰기만 해도 된다고 했다. 대다수가 자유 주제를 정해 초고를 써 발표하고, 돌아가면서 강평해 받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이끌면 좋겠다고 했다.
그다음 시간에 몇몇 청소년들이 써 온 글들을 공유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장 구사 방식이나 단어 사용 측면에서 그다지 참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스엔에스(SNS) 글쓰기에 익숙한 세대치고 글이 ‘어른스러웠다’. 10대 특유의 감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하고, 일상적이고 소박한 삶의 결이 드러나는 글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관념어들이 글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일반론에 따른 구태의연한 내용 전개 방식도 식상함을 안겨 주었다.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각자의 언어론’을 더 밀도 있게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랬나 싶었다.
‘각자의 언어론’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이와 정반대로 각자의 언어를 중시하는 것이 오히려 언어를 가다루는 학생들의 능력을 답보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학생들이 각자의 언어에 머무르면서 더 나은 변화를 향한 노력을 덜 기울일까 싶어서다. 학생들에게 솔직하고 주체적인 글쓰기를 강조하다 보면 이렇게 순간순간 이런저런 의구심이 떠오른다.
3
이번 학기 글쓰기 활동 계획을 여느 때와 조금 다르게 세웠다. 개학 후 첫 시간에 글쓰기 활동 계획지를 들고 갔다. 이를 학생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면서 독후감과 주장 글 두 편에 대한 글쓰기 계획을 구상하여 계획지에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계획지 쓰기 활동의 핵심을, 학생들이 자신이 읽을 책과 독후감을 쓰는 방식과 제출하고 싶은 일정 등을 직접 선택해 결정하는 데 두었다.
이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구상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경험적인 배경이 있다. 지금까지는 학생들에게 동시적이고 일괄적인 방식으로 글쓰기 활동을 하게 했다. 그렇게 하면 학생들의 글쓰기 과정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많은 학생이 제출 시한으로 정한 일자에 임박해 글을 대충 써서 제출했다. 결과물이 시원찮았다. 진정성과 솔직함이 떨어져 눈여겨 볼 만한 글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전 계획과 구상 과정에서 글쓰기에 대한 학생들의 자발적 의지(?)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는 활동 계획을 구상하면서 학생들이 각자 자신의 독서 습관과 감각, 글쓰기 능력 들을 고려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책을 읽거나 참고자료를 준비하여 글을 쓰게 하고 싶었다.
수업 시간에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하여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경청했다. 계획지 쓰기 활동을 마무리한 뒤 2학년 전체 5개 반 학생들이 계획지에 써 놓은 주장 글 주제들을 정리해 보았다. 사안이 겹치거나 비슷한 내용들을 뭉뚱그려 범주화해 보니 모두 39가지나 되는 주제들이 나왔다. 학생들이 구상하고 있는 글의 전체 기조나 관점까지를 참고해서 분류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9가지 주제 중 학생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내용은 학교나 교육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학교생활규정(교칙), 학교시설 개선이나 확충, 시험 감축이나 폐지,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예방대책, 등교 시간 조정, 방학 기간 연장, 학원 폐지를 포함한 학생의 학습 자유권 보장 들이 적혀 있었다. 청소년 세대에게 관심이 많은 게임 중독 문제나, 스마트폰 사용에 관한 주제도 꽤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잡아 끈 주제들은 정치사회적 현안이나 논란이 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전통적인(?) 주제인 사형제나 개고기 식용 여부, 인간과 동물의 안락사, 독도 문제를 비롯하여 사드 배치 문제, 탈핵, 페미니즘과 동성애, 청소년 투표권, 징병제 등 민감한 현안 주제들이 다양한 차원에 걸쳐 있었다.
나는 이번 글쓰기 활동을 학생들의 다양한 시선과 언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구안했다. 학생 스스로 주제를 정함으로써 자발성을 이끌어내고, 교사가 일방적으로 정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더 밀도 있는 글쓰기를 유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이번 글쓰기 활동은 내가 예상하고 기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같다. 며칠 전 아침이었다. 주연(가명)이가 글쓰기 결과물을 내기 위해 교무실에 찾아왔다. 독후감과 주장 글을 한꺼번에 가져왔다. 줄칸 원고지에 또박또박 쓴 문장들이 정갈하게 보였다.
주연이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이번과 같이 스스로 주제를 정해 글을 쓰고 제출하는 방식이 어땠는지 소감을 물었다. 괜찮았다고 대답했다. 속내를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다. 혹시 글을 쓸 때 임하는 마음가짐에 바뀐 게 없느냐고 넌즈시 물었다. 자료를 직접 찾아보려는 마음이 생기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좋았다고 했다.
주연이가 가고 난 뒤 주장 글을 훑어 보았다. 교칙 적용의 불합리함과 교사들의 태도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논리정연함이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주연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른 학생들이 가져오는 결과물을 기대해도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4
나는 글쓰기가 질문하기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무엇을 쓸 것인가. 그것을 왜, 어떻게 쓰는가. 글을 구상하고 쓰는 과정 내내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오가야 하지 않을까. 이 글에서 내내 강조하는 ‘각자의 언어론’도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알차게 실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글쓰기는 ‘나’ 자신과 그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다. 각자의 언어는 그 ‘나’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밖에 없다. 뜨겁거나 차가운 언어, 폭발하듯 튀어오르거나 수심 깊은 호수의 물마냥 잔잔한 문장들이 각자의 언어 한 자락을 차지할 것이다. 그 다채로운 문장들을 통해 각자의 삶이, 서로 다른 일상의 미세한 결들이 드러날 것이다.
2000년대 이래 매체 환경이 급격하게 온라인 중심으로 변했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은 최근 스마트폰을 통한 글쓰기가 널리 퍼지면서 전통적인 쓰기 문화가 크게 달라진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의 쓰기 문화 역시 지난 시절의 그것과 비교해 달라진 점들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청소년들이 긴 호흡의 글을 쓰기 힘들어 한다거나 정체불명의 ‘외계어’가 출몰하는 문장들을 즐겨 구사한다는 식의 말들을 자주 한다. 그래서 종종 청소년들이 쓴 글은 뚜렷한 근거 없이 ‘카더라’ 식 악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유의 글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교실과 학교 안팎에서 만나는 청소년 학생들의 글들 대다수는 어른들이 우려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은 것 같다. ‘각자의 언어론’을 자연스럽 펼칠 수 있는 조건과 배경이 갖추어진다면 그들 모두 각자의 경험과 머릿속 생각을 모두어 그럴 듯하게 글 한 편을 써낸다. 어른들의 우려와 달리, 요즈음 청소년과 학생들 모두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한, “펜은 마음의 혀”라는 고색창연한 말을 모두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 격월간 잡지 <민들레> 제113호(2017년 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