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언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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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제정신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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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국에서 9·11 사태가 일어났다. 2년 뒤 미국 정부는 9·11 사태의 대응책으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표면적으로 대량 살상 무기(WMD) 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뒤따랐다. 이 전쟁에는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부여되었다. 이라크에 자유와 평화를 선사한다는 도덕적인 목표에서였다.
적국에 대한 공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희생자는 전쟁의 명분을 떨어뜨리고 그 정당성(?)을 훼손한다. 미국은 9·11 이후 이라크를 중심으로 중동 지역에서 일으킨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를 ‘부수적인 피해’로 지칭했다. 한국전쟁(1950~1953) 중 자신들의 공중 폭격으로 희생된 남북한 민간인들도 이와 똑같이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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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이끈 독일 나치 당국에서는 매우 엄격한 ‘언어규칙’을 썼다. 연인원 1200만 명의 대학살극이 벌어졌으나 ‘제거’, ‘박멸’, ‘학살’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인 보고서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최일선에서 유대인 학살을 직접 수행한 돌격대 보고서에서만 이들 단어가 쓰였다.
전무후무한 ‘학살’을 대체한 표현은 ‘최종 해결책’, ‘소개’, ‘특별취급’ 따위였다. 수용소로의 ‘이송’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의 말이 대신했다.
나치가 만들어낸 가장 경악스러운 ‘언어규칙’은 ‘살인’을 ‘안락사 제공’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자 포고령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포고령에 따라 최초의 가스 방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가스 수용소는 의료 시설처럼 선전되었다.
이런 말들은 일종의 암호화한 언어였다. 오직 ‘비밀을 가진 자들’(고위층)만이 암호화하지 않은 원래의 말을 쓸 수 있었다. 그들조차도 일상적인 업무 수행 과정에서는 암호화한 언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것이 그들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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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라크의 자유’ 전쟁이나 한국전쟁 중의 미군 조종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 패당들과 다르다. 공중 폭격 중 심리적 긴장감에 시달리거나, 학살이라는 패륜적인 범죄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학생을 사랑한다. 양심과 정의가 우리를 이끄는 주된 원동력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특유의 근면과 성실과 열정의 힘으로 지배한다.
나치 잔당들과 달리, 우리는 학교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많은 이의 숨을 서서히 끊어 놓는 일을 하면서도 제정신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나날의 일상이자, 마땅히 해내야 할 엄중한 책무가 되기도 한다.
가령 ‘평가’와 ‘성과’가 지고선의 자리에 있어 온갖 경쟁적인 관행과 습속을 유지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다. 서열화와 등급제로 스스로를 분리하고 배제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수행한다. 그 사이 우리는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기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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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가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가 주창했다.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적절한 말은 하나밖에 없다.
언어는 미약하다. 때로 언어는 힘이 세다. 사태의 본질과 진실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고 드러나곤 한다. 살아있는 말을, 사태를 핍진하게 드러내는 진실한 말을 되찾아야겠다. 언어를 부려 스스로 성찰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새해를 맞는 다짐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무료 이미지 제공 사이트 픽사베이(pixabay.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