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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r 07. 2018

수상한 편지

말과 글의 힘에 대하여

1


‘수상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와 보니 내 책상 위 한 모서리에 편지 한 통이,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잡지 몇 권과 회보와 소식지 들과 함께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주소와 이름을 살펴보았다. 낯설었다.


주소가 ‘강원도 원주우체국’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낸 이는 올해 40대 후반에 이른 어느 수감자였다. 생면부지의 그를 내게 연결시킨 것은 지난해 연말 「경향신문」에 기고한 <교사 정치 활동의 세계 표준은 ‘허용’>이라는 제목의 칼럼 글이었다.


묘한 일이었다.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을 촉구하는 ‘정치색’ 짙은 글이, 그가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데 들무새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편지에 내게 책 한 권을 선물 받고 싶다고 썼다. 내가 장차 건네줄 책을 ‘임계점’ 삼아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데 쓰고 싶다는 희망을 담담히 토로했다.


2


편지를 다 읽은 뒤 한참 동안 봉투와 서한지에 가지런히 쓰인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근대국어 언문 자료에서나 볼 법한 부드러운 자형(字形)의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새겨 넣으며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선생님 전(前) 올립니다”나 “건승하십시오” 같은 예스러운 극존칭의 문체 표현에 눈길을 주면서, 나는 문득 현실을 초월하여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옮아가는 듯한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휘날리는 태극기 그림을 배경으로 하는 330원짜리 우표조차 우리의 우연한 ‘인연’을 상징하는 뜻밖의 문양처럼 다가왔다. 참으로 묘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3


나는 2교시부터 시작해 연달아 3시간 동안 이어진 수업 시간에 편지를 들고 들어갔다. 이번 학기 첫 한두 시간의 수업을 학생들 스스로 국어나 말글살이의 중요성과 국어 공부를 하는 이유 들을 생각해 정리해 보는 활동으로 구상했다. 우연의 시공간을 타고 내게 건네진 낯선 이의 편지 한 통이 이를 위한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될 것 같았다.


학생들에게 편지 몇 대목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말 한 마디나 글 한 편이 우리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서 때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말을 경청했다.

평소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교육자로서,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교육 활동에 훌륭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느샌가 내게는 글을 쓰는 일이 교육 활동을 준비하는 일인 동시에 나 자신을 세상 어느 한 곳에 자리잡게 하는 대사회적 활동이 된 것 같다.


4


어느 반에서 편지를 소개한 뒤, 그에게 어떤 책을 선물해 주는 것이 좋을지 학생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작년 말 내게 <우동 한 그릇>을 추천 받아 읽은 영수(가명)가 말했다.


“<우동 한 그릇>이오.”


“<우동 한 그릇> 좋지. 감동적인 이야기니까 괜찮을 것 같아. 그렇지?”


나는 영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되물었다. 영수가 그윽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가 추천한 <우동 한 그릇>을 함께 넣어 그에게 보낼 책 보따리를 어떻게 챙기면 좋을까. 뜻밖의 편지 한 통이 긴장 속에서 3월 새 학기를 맞고 있는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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