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교육과정의 ‘음모론’에 대하여
1
나는 자주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쓰고 있는 ‘핵심역량’을 떠올리며 냉소한다.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등 6가지 역량을 기르면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 교양 있는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같은 인간상을 구현할 수 있다는 도식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도식에 따르면, 예를 들어 자기관리 역량을 기르면 자주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논리의 근거가 무엇일까. ‘자기관리’에 담긴 교육철학의 한계나 폐해는 없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어느 공부모임에서 교육과정을 놓고 여러 선생님과 토론할 때 국가교육과정의 ‘음모론’을 생각해보자고 했다. 나는 권력과 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스스로를 관리하는 주체가 매우 효율적이라고 본다. 국가교육과정에 음모론이 숨어 있다면 그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2
이 글에서 문제 삼고 싶은 말은 ‘역량’이다. 역량을 능력과 구별하여 설명하는 교육 전문가들이 많다. 솔직히 그 둘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역량이 곧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적으로 역량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 능력은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다. 둘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역량 개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데세코 프로젝트(DeSeCo; 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es)’에서 출발하였다. 데세코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한 주요 12개 국가가 오이시디의 지원을 받아 실시한 교육 프로젝트였다. 급변하는 미래 사회에서 개인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되었다.
‘데세코’는 미래 사회에서 개인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3대 핵심 역량 범주를 가리킨다. ‘도구를 상호적으로 활용하기(Use tools interactively)’, ‘이질적인 집단 안에서의 사회적인 상호작용(Interact in heterogeneous groups)’, ‘자율적으로 행동하기(Act autonomously)’ 들이다. 전능한 개인, 스스로 통치하는 최고경영자(CEO) 들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3
역량은 곧 만능어가 되었다. 사전적으로 능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말이 능력이 쓰일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기 시작했다. 국가교육과정에서 주요 개념으로 쓰이게 되면서부터는 신비한 아우라가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기초 학업 역량’이 ‘기초 학업 능력’과 얼마나 다른지 이해하기 어렵다.
데세코 프로젝트는 세계 주요 산업 국가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보수적인 오이시디가 관장하였다. 그것은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을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제하고 양성하기 위한 산업 표준화 프로젝트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을 기르라’는 메시지가 국가교육과정 핵심역량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이게 된 과정에 숨은 음모론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역량이 교육 유행어처럼 널리 쓰이고 있는 학교 안팎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능력이, 또는 능력주의가 과잉 유포된 우리 사회의 어떤 분위기를 국가가 학교교육을 통해 부채질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혼다 유키 일본 도쿄 대학교 대학원 교육과 교수가 다양한 유형의 능력을 중시하게끔 된 사회를 가리키는 말로 ‘하이퍼 메리트 크라시(hyper merit cracy)’라는 용어를 썼다고 한다. 접두사 ‘hyper’가 ‘과도한’이라는 뜻이 있으니 ‘능력 과잉 사회’라고 해도 되겠다. 자기관리 역량을 필두로 ‘무려’ 6가지나 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학교야말로 능력 과잉 사회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4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끝맺으려고 한다. 학교가 그 모든 역량을 키울 수 있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를 관리할 줄 아는 최고경영자의 철학을 안고 교문을 나서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음울한 디스토피아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