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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16. 2018

김수영, 짤막한 독후감

김영종의 소설 <거대한 뿌리, 그리고 김일성 만세>(도서출판 말)을 읽고

1


이십대 후반경, 고풍스러운 한옥 추녀가 일품이었던 어느 연구원의 지하 서고와 호젓한 연못 위 팔각정에서 김수영의 시를 만났다. 나를 미친 사람처럼 홀리게 한 김수영의 작품은 그가 1964년에 쓴 시 <거대한 뿌리>였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와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들을 읽으며 전율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술이 불콰하게 오른 날이면 동학들 앞에서 짐짓 웅장한 목소리를 내며 <거대한 뿌리>를 암송하였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를 읽으며, 광화문과 시구문과 피맛골 따위를 어린 시절 산 고향처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서울살이 10여년만에 서울을 온전히 품으로 받아들이게 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거대한 뿌리> 제4연에는 "무수한 반동"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 "무수한 반동"들을 읽으며, 김수영이 꿈꾼 세상을 상상하곤 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 이 땅의 "무수한 반동"들이 만들어온,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갈 "거대한 뿌리"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 "거대한 뿌리"를 땅 속 깊숙이 묻고 제대로 설 수 있을까. 나는 김수영이 시를 쓰며 상상하고 궁구했을 생각들이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3


소설가 김영종이 쓴 <거대한 뿌리, 그리고 김일성 만세>(도서출판 말)를 단숨에 읽었다. '반동, 종북'이라는 언어가 여전히 '반동, 종북'을 만드는 세상, 남북 정상과 북미 정상이 만나 정전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한편에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세상 이야기가 한 편의 풍자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나는 우리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멀되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세상이 다 완성되었다고, 끝났다고, 혹은 더는 달리 어찌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그들이 김영종의 이 소설을 찬찬히 새겨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정말 아직 갈 길이 멀다.


4


며칠 후면 황규관 시인이 쓴 산문집 <리얼리스트 김수영>을 손에 넣는다. 나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과 소설가를 상상하지 못한다. 사오 년 전 김수영의 시 100여편을 읽고 쓰면서 내내 머리에서 버리지 않은 생각이 그것이었다. 황규관 시인에게 미리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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