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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Nov 16. 2018

교사 구보 씨의 일일

1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구보 씨는 자신의 직무가 국어 교과서 단원 순서에 맞춰 교과서 내용을 줄줄이 전달해 주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별 긴장감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구보 선생의 국어 교육에는 국어 교사를 비롯한 이 땅의 대다수 교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유지되고 전승되어 온 “줄줄이 전달해 주는” 기술 외에 다른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보 선생뿐 아니라 교사라면 누구나 그럴 만하였다. 이들 교사 대부분은 너무나 똑똑하고 성실하며 순종적이기 때문이다.


2


젊은 시절 한때 묵직하지만 생생한 고민과 실천을 해 온 구보 선생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점점 어떤 흥미나 관심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교무실과 교실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매해 똑같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구보 선생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 쪽지에 적힌 교실에 순서대로 들어가 똑같은 말을 두세 번씩 줄줄이 쏟아냈다.


누군가가 구보 선생에게 “교직의 숭고한 사명”이니 “교육의 가능성과 미래”니 하는 말을 운운하면 구보 선생은 씩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뭐, 그래야겠죠.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나요? 학교에서는?”


3


구보 선생은 몇 년 주기로 그만그만한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도 고정된 급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생활에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구보 선생이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자신에게 거들먹거리는 교장들뿐이었다.


구보 선생은 교장들이 별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학교에서 엄청난 권력자 행세를 하고, 승진 점수로 교사들 등골을 빼먹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요컨대 교장들은 구보 선생의 거의 유일한 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구보 선생은 승진하여 급여를 조금 더 받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교장들이 따로 알지 못할 고뇌와 고독에 빠져 지낸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고 있었다.


구보 선생은 돈을 조금 더 받고 학교에서 권력을 행사하며 사회적인 대접이 좀 더 높아지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으며, 무언가 책임감을 떠안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대신 구보 선생은 퇴근 시각에 정확히 맞춰 하루 일과를 끝낸 뒤 그 어떤 협력적인 만남이나 연대 활동도 하지 않기를 고대하였다.


4


구보 선생은 출세와 성공을 위한 온갖 세속적인 욕망을 모른 체했다. 지금 구보 선생은 유서 깊은 방식으로 수업을 하고, 정해진 급여를 받으며, 책임감을 떠안는 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냉소주의와 회의주의의 길을 따라 조용히 살아간다.


어느새 구보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신인류 교사가 되었다.



* 이 글은,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인문사회학자 리처드 호가트가 <교양의 효용>에서 클리셰와 각종 삶의 태도의 전형적인 무심함과 불안함으로 무장한, 평범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인 사람들의 모습을 날카롭게 묘사한 대목(“제9장 탄력을 잃은 용수철: 긴장감이 사라진 회의주의에 대한 기록”) 일부를 차용하여 패러디해 썼다. 호가트는 예의 “괜찮은 편인” 평범한 사람들 범주에 “간단한 기술의 기능공이나 숙련공, 배관공, 페인트쟁이, 가전제품 유지관리인” 들을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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