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Dec 20. 2018

학교생활기록부 독재 시대

1     


이경숙은 <시험 국민의 탄생>(푸른 역사, 2017)에서 학교에서 사용하는 기록 방식이 당대 사회의 인간에 관한 철학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 교육적으로 어떤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록 방식이 권력이 인간을 보고 주조하는 시선이 된다고 규정하였다.  
   

학교생활기록 행동 발달 상황 기록 내용의 변천사를 정리한 표를 보았다. 나는 1976년 3월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988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내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는 ‘근면성, 자주성, 협동성, 책임감, 특기사항’ 등의 5개 항목이 행동 상황 관련 항목들로 들어가 있었다.


당시 나는 스스로, 그리고 다른 사람(교사, 부모 등)에 의해 근면과 자주와 협동과 책임의 영역에서만 평가 받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산업 사회가 발달하면서 국가나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요구한 근대식 규율의 핵심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1988년까지 인성 평가 항목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항목은 근면성과 책임감이었다고 한다.


2     


학년말이 다가오자 교무부장은 연례 정기 행사처럼 학생부를 규정과 원칙에 따라 정리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는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다. 오늘 아침 레퍼토리는 ‘장래 희망’ 서술 방식과 연월일 표기 방식과 문장 종결부 서술 원칙이었다. ‘공무원’보다 ‘행정 공무원’이 낫다. 기간을 쓸 때는 ‘~’이 아니라 ‘-’을 써야 한다. 문장 종결 표현은, ‘하였다.’가 아니라 ‘하였음.’으로 하라.   

   

오후참에는 학생부 점검단이 왔다고 한다. ‘장래 희망’ 사유 칸에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를 쓴 학생 사례를 콕 꼬집으면서 실제 사유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나게 고쳐 쓸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온종일 기분이 꿀꿀하였다.     


3     


학생부는 두 가지 분명한 목적을 갖는다. 첫째는 학생 지도를 위한 자료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상급학교 학생 선발에 활용하기 위함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첫째 목적이 사라지고 오로지 둘째 목적만 강조되고 있다. 교무부장의 연말 레퍼토리와 학생부 점검단의 ‘듣보잡’ 오지랖이 생존하는 방법이다.

    

학생부를 상급 학교 진학 자료로 활용하는 제도를 갖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학생부 기록과 관련하여 진학 자료로서의 변별력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교육 당국은, ‘출결 사항’과 ‘수상 경력’과 ‘자격증 및 인증 취득 상황’과 ‘진로 희망 사항’과 ‘ 창의적 체험 활동’과 ‘교과 학습 발달’과 ‘교과 학습 발달’과 ‘독서 활동’과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 들을 기록하고 그와 관련된 자료를 처리하는 요령을 기술한 수백 쪽짜리 자료를 만들어 각급 학교와 교사에게 배포한다.      


교육청은 학생부 기록 연수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며, 학생부 기록의 내용적‧형식적 완벽함과 공정함을 지상 최대의 명제처럼 설파한다. 교사들은 학생부 기재 내용을 바탕으로 한 학생 지도 방향에 대한 논의 대신, 기재 내용이 자동 오류 검증 시스템이나 교사 간 교차 점검이나 상급 기관 현장 검증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기술과 요령을 습득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5     

학생부가 한 개인에 대한 모든 평가 내용을 망라하는 것으로 바뀐 것은 1938년 중일전쟁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내용을 학생부에 기재해 왔다. 현재 학생부 기재 항목 수는 한국이 10개, 일본이 9개인 데 반해 프랑스 7개, 미국 5개, 독일과 호주 4개다.


학생부는 학생, 나아가 전 국민을 평생 동안 따라다니며 그들 각자의 인간됨을 총체적이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국가 인증 자료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국가는 한 개인의 최민감 정보들을 저인망 식으로 집적해 놓은 자료를 ‘교육’과 ‘지도’라는 미명 아래 합법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기록되는 모든 것이 교육적일 것이라는 생각, 더 많이 기록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 지금 보기에 필요하다 싶은 모든 것들을 망라해 기록하면 장차 필요할 것이라는 시각, 이는 한 인간의 삶을 기록 속에 집어 넣어 기록 속에 가두어 버리는 행위이다.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행위이며, 적극적으로 양심에 개입하여 평가하는 행위이다. 과연 학생들의 봉사 활동과 독서 활동 상황까지 모두 기록하여 국가가 준영구적으로 그 기록을 보관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 이경숙(2017), 《시험 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349쪽.     


지금 대한민국 학교는 암울한 학생부 독재 시대를 지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3만 5천 원짜리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