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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pr 30. 2019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0)

1


학교와 교실에서 ‘나’가 무시되는 풍경은 일상적이다. 나는 한 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다른 학생들이 “그건 네 생각이지.”라면서 교실을 순간 ‘비민주적인’ 담화 현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례를 수도 없이 떠올릴 수 있다. 그때마다 “여러분” 하고 주의를 환기하면서 경청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일장 훈시를 하지만, 학생들은 금방 변하지 않는다.


나는 몇 년 전 교직원 회의 때 펼쳐진 낯선 듯 낯익은 풍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김 선생님은 어떤 현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평소 풀어 내지 못한 감정도 함께 드러내고 싶었을까.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김 선생님의 목소리 톤이 조금 높다고 느꼈다. 회의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고요에 휩싸였다. 김 선생님의 말소리가 조금 더 커지고 빨라졌다 싶을 때, 이 선생님이 김 선생님의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건 김 선생님 개인 의견이고요.”


김 선생님에게 반박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한 마디였지만, 이 선생님 말소리에 사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 말하는 의견은 당사자 ‘개인’의 것이라는, 우리 모두 이미 잘 알고 있는 당연한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김 선생님이 이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제 개인 의견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김 선생님의 어조는 단호했다.


2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어떤 사람이 말하는 의견은 그 자신의 것이므로 개인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는”이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따위의 말을 덧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김 선생님이 맞고 이 선생님이 틀렸다.


그러나 우리는 김 선생님보다 이 선생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마치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결코 개인적이지 않으며 공평무사한 의견이 따로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단언컨대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김 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의견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주고받은 짧은 대화를 떠올리며 ‘나’를 말하거나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절감했다. 교사들은 ‘나’를 드러내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최대한 숨기거나 절제해야 하는 시스템 아래서 살아 간다. 교사는 “법령에 따라 교육”하는 것이 법률이 정한 임무이며, 국가교육과정에서 명시한 교육 목표와 “추구하는 인간상”을 염두에 두고 수업을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구조적으로 ‘나’를 개입시킬 여지가 거의 없거나, ‘나’를 숨길 수밖에 없다.


3


나는 지금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고 항변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다. 교사는 공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므로 1인칭 말하기와 글쓰기를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가. 교사가 ‘나’를 앞세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교육 활동이 사적인 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법령’과 ‘국가교육과정’이라는 기준이 없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란과 무질서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독자들이 ‘나’ 말하기와 글쓰기가 어렵다는 말에 숨은 다른 의미를 찬찬히 살펴 보았으면 좋겠다. ‘나’ 글쓰기와 책임감의 문제를 연결해 살핀 앞 절의 내용을 다시 가져오자. 나는 ‘나’ 글쓰기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진실하게 말하고 독자와 손쉽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조금 더 부연해 보자.


진실하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고, 현실에 터를 잡고 있다는 말이다.(최소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가 사실이 아닌 것, 거짓인 것을 말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으며,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 주어문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부담스럽다. 독자와 손쉽게 소통한다는 것은 독자가 ‘나’(의 생각과 경험) 이외의 다른 주체, 수단, 경로를 번거롭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때 ‘나’와 독자의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질적으로 변화하며, 그렇게 변화한 관계 속에서 ‘나’는 ‘너’에게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없다!


4


3인칭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조너선 코졸의 말이 허세 넘치는 과장이나 촌철살인의 풍자만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삼인칭으로 숨 쉬고 살아가는 조종사와 대통령은 무기 하나로 대륙 전체를 초토화하거나 도시 하나를 없애거나 주민을 몰살한는 섬뜩한 짓을 저지른 후에도 자러 가서는 여덟 시간 내내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 조너선 코졸 씀, 김명신 옮김(2011), 《교사로 산다는 것》, 양철북, 26쪽.


3인칭으로 이루어지는 언어 활동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일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저자들이 마치 익명의 정체성을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3인칭으로 서술하는 교육 언어들에서 부정의 낌새를 조금이라도 내보이는 사례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 익명의 저자들은 학교 안팎에서 쓰이는 교육 비전과 교육 목표와 구체적인 교육 활동 들을 아름다운 단어들로 장식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은밀하게 강요하는 독해의 지침은 ‘희망’과 ‘성과’와 ‘가능성’이다.


5


전라북도 교육청이 내세우는 교육 비전은 수년째 “가고 싶은 학교 행복한 교육 공동체”이다. 우리 학교에는 교실 벽마다 “즐거운 학교를 위한 학생의 약속”이라는 제목의 글이 담겨 있는 교육용 게시판이 붙어 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같은 계몽적인 내용의 문장 8개로 채워져 있다. 몇몇 학급 출입문에는 “타 학급 출입 금지”라는 쪽지가 붙어 있다.


나는 이들이 주어가 없거나 교묘하게 은폐된 3인칭 문장의 전형적인 사례처럼 보인다. 전북교육청의 교육 비전 문구는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의 시점에 따라 서술된 것일까.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주체는 ‘학생’과 ‘교사’여야겠으나, 나는 저 문구를 볼 때마다 자꾸만 ‘교육감’이라는 무소불위의 주체가 떠오른다. 우리 학교 교실 게시판에 적힌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학교(교장, 교사)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지시’나 ‘명령’ 같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어떤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6


나는 일부 글쓰기 교과서들에서 저자들이 주관성을 글을 망치는 주범처럼 취급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개인적’이라는 말이 환기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나’ 말하기와 글쓰기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어 버릴 것 같아 걱정한다. 무릇 모든 글이 ‘나’에서 출발하며, ‘나’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관점에 서면 주관성이 명확하지 않은 글이 오히려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 독자들 역시 동의하게 될 것이다. ‘나’를 쓰지 않은 글, ‘나’를 교묘하게 은폐하는 글을 쓰는 저자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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