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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y 10. 2019

글이 ‘우리’를 만든다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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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쓰기와 관련하여 생길 수 있는 오해 몇 가지를 짚어 가면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자.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 ‘나’를 전면에 내세워 주인공처럼 움직이게 하는 글쓰기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일까 염려스럽다.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미국 교육자 조너선 코졸이 한 에세이(조너선 코졸 씀, 김명신 옮김(2011), 《교사로 산다는 것》, 양철북, 25~31쪽에 실린 “내가 한 말은 나의 의견이 아니다?: 1인칭으로 말하기”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다.)에서 ‘1인칭으로 말하기’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 끝에 남긴 마지막 문장을 소개한다.


“우선 ‘나’를 말하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를 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코졸 선생님이 단지 수사적 효과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에 담긴 철학이나 정신이 코졸과 같은 특별한 교육자들이나 가질 법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 최초의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탄생했으며, 말하기와 글쓰기가 ‘나’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나’와 ‘너’)의 테두리 안에 존재할 때 의미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순연한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말하기와 글쓰기는 없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속으로 다짐의 독백을 하는 나는 또 다른 나를 청자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기를 쓰면서 언젠가 그 일기를 읽을 또 다른 나를 가상의 독자처럼 머리에 떠올린다. 그날 내가 겪은 경험을 묘사하고, 그 경험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단어를 선택하거나 문장을 구성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말하자면 나는 독백을 하고 일기를 쓰는 시간 동안 상호작용적인 대화 시간을 경험한다. 아침에 독백을 하는 나는 바로 지금 현실 세계의 ‘나’와 곧 다가올 또 다른 현실 세계 속의 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일기문을 쓰는 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살아가는 나(=또는 가상의 독자로서의 ‘너’)에게 전해지는 일기 속 이야기가 진실하게 다가가기를 기대한다.


내가 고른 단어와 내가 쓴 문장이 지금 ‘나’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 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나는 ‘나’가 행하는 모든 언어 활동이 ‘너’를 전제로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지향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와 ‘너’가 함께하는 말과 글이, 말하기와 글쓰기가 ‘우리’를 만든다.


3


‘나’ 글쓰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려면 가짜 ‘나’ 글쓰기를 경계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개조식 글쓰기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개조식으로 쓰인 문장은 가짜 ‘나’ 글쓰기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개조식 글쓰기와 더불어 가짜 ‘나’ 글쓰기를 확산시키는 또 다른 글쓰기 유형이 있다. 나는 파워포인트형 글쓰기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파워포인트는 정보 전달의 효율화를 극대화하려는 차원에서 고안된 프레젠테이션 도구다. 파워포인트형 글쓰기에서는 압축성을 중시한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슬라이드 1개당 텍스트 정보가 5행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따위의 지침으로 드러나는 특성이 압축성이다. 내용을 효과적으로 축약하여 제시하면 메시지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파워포인트형 글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철골 구조물처럼 보인다. 그 삭막한 정보들을 보는 머리와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느낌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파워포인트형 글쓰기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통해서 구체화하는 감각성을 중시한다. 사진, 그림, 동영상 등의 시각 자료들이 자유롭게 출몰하는 프레젠테이션 장면을 연상해 보자. 우리 눈과 귀는 빠르게 점멸하는 시각 자료들 사이를 바삐 오간다. 두뇌는 시각이나 청각 영역을 관장하는 뇌세포들 사이에 부지런히 전기 신호를 보낸다. 그 사이 초감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상상, 사유, 의식, 성찰 같은 내적 작용은 자리를 잡기 힘들다. 파워포인트형 글과 자료에 몰입하는 두뇌는 특유의 이미지성에 갇힌 채 감각 작용을 극대화하는 데 골몰한다.


파워포인트형 글쓰기는 우리 삶의 주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 와 급기야 서류와 공문서와 보고서와 개인적인 에세이 유의 특징을 지배적으로 드러내는 문체가 되었다. 나는 파워포인트형 글쓰기의 매개 수단이 개조식 문장이며, 개조식 문장이 기생하는 숙주 공간이 파워포인트라고 이해한다. 나는 개조식 문장을 쓰지 않는 파워포인트형 글쓰기를 상상하기 힘들다. 개조식 문장이 어울리는 언어적 매체로 파워포인트보다 더 나은 매체는 없다.


4


파워포인트는 죄가 없다. 우리는 잘 짜인 파워포인트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작가, 전문가, 강연자들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라는 스티브 잡스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수많은 청중을 설득하고 열광하게 하며 감동의 세계로 인도한다. 파워포인트형 글쓰기가 가짜 ‘나’ 글쓰기를 확산시킨다는 당신의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렇게 항의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다. 나는 그분들께 다음 두 가지 사례를 알려주고 싶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2014년 “제로 피피티(PPT)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 시작 3개월 뒤 현대카드는 워드프로세서 38퍼센트, 엑셀 35퍼센트, 이메일 19퍼센트로 피피티를 대체했고, 회사 설문조사에서도 사내 문화가 바뀌었다는 의견이 78퍼센트를 차지해 임직원들의 만족감도 높았다고 한다.


2016년 3월에는 캠페인이 아니라 아예 피피티 금지령을 내렸다. 3개월 뒤 정 부회장은 피피티 금지 효과를 6가지로 요약하여 페이스북에 올렸다. 보고서 분량이 줄고, 회의 시간이 짧아졌으며, 논의가 핵심에 집중되었다. 연간 5000만 장에 이르던 인쇄용지 사용 수도 크게 줄었다.


안티-파워포인트 현상은 세계 유수 기업들에 속속 퍼지고 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는 2018년 연초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직원 회의 시 파워포인트 발표를 금지하고 ‘6쪽짜리 서술형 줄글 읽기’를 권장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베조스가 파워포인트 대신 줄글 쓰기와 읽기를 강조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사람 뇌는 항목별로 정리한 요약 글보다 서술형으로 작성한 글에 더 적합하다. 이는 뇌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적합하도록 설계됐다는 뇌 과학자들의 견해에 따른 것이다. 둘째, 이야기는 슬라이드보다 설득력이 있다. 슬라이드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발표 내용을 개인적인 일화로 풀어내는 것이 청자의 감정에 더 호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셋째, 파워포인트 특유의 ‘글머리 기호’ 정리 방식이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데 가장 비효율적이다. 이야기로 직접 전해 들은 말은 기억하기 쉬운데, 글머리로 정리된 항목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5


우리는 현대카드나 아마존 같은 회사들이 성과와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사내 문화 아래서 움직인다고 짐작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나 또한 그들이 성과와 효율성과 속도의 철학에 깊이 빠져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의 철학은 짧고 간결하고 명확한 파워포인트형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런 생각들이 옳다면 그들은 비효율적이고 느린 매체의 본보기인 (줄)글을 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나’ 글쓰기의 힘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편의 글에 등장하는 모든 ‘나’ 이야기는 ‘너’를 호출한다. 파커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 자신을 교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의 자리에 나를 집어 넣는다. 파머는 그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너’가 된다. 그렇게 나와 파머는 ‘우리’가 된다. ‘나’와 ‘너’는 ‘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6


파워포인트에는 ‘나’가 없다. 그곳에는 ‘너’가 없으며, ‘우리’ 역시 존재하기 힘들다. ‘우리’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곳에서 ‘나’와 ‘너’가 설 곳은 없다.


나는 화려하고 매끄러운 슬라이드로 무장한 프리젠터들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강연장을 수없이 오갔다. 그러나 나는 강연장들에서 본 그 무수한 슬라이드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나는 ‘나’ 주어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한 명의 사람 존재를 기억할 뿐이다. 혹은 그가 나에게 주었던 순간의 어떤 인간적인 감정을.


나는 아래에서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을 한 ‘교사’가 분명 ‘나’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그것이야말로 평생 잊히지 않는 교훈이 될 것이다.”


* 현대카드 사례는 《머니투데이》, 2016년 5월 7일 자 기사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PPT 없애니 달라진 것들”>을 참조했다.

** 아마존 사례는 《뉴스 1》, 2018년 5월 5일 자 기사 <베조스 CEO, 아마존서 ‘PPT 금지’한 3가지 이유는>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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