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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y 17. 2019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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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장 오래된 대명사다. ‘나’가 존재하고 ‘너’가 생겨났다! 나는 ‘나’ 이야기가 1인칭 대명사 ‘나’가 형성될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최초 이야기의 출발점에 ‘나’가 있다.


‘나’ 이야기는 인간의 본질과 인간 됨의 근원을 보여준다. ‘나’를 오롯이 대면하는 ‘나’ 글쓰기는 다른 어떤 성찰 도구보다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는다. 우리는 ‘나’를 진솔하게 돌아보는 한 편의 글을 통해 아픈 몸을 치유하고 절망에 빠지려는 마음을 추스른다. 그 과정에서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자신의 힘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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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성 편두통에 시달리던 셰퍼드 코미나스는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에서 글쓰기를 통해 힘과 용기를 얻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셰퍼드 코미나스 씀, 임옥희 옮김(2018),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 홍익출판사, 10~22쪽.] 코미나스는 통증클리닉의 70대 전문의가 제안한 일기 쓰기를 시작한 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편두통이나 어깨 결림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오후 내내 일기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코미나스는 그렇게 하루하루 일기를 써 나가면서 “내가 곧 편두통”이라는 식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코미나스는 일기 쓰기를 50년 동안 계속하였다. 


일기는 가장 대표적인 ‘나’ 글쓰기의 한 사례다. 일기에는 ‘나’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이 가장 생생한 날것의 형태로 담길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일기는 ‘나’를 있는 그대로 돌아보고 직면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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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기와 같은 글쓰기 외에도 ‘나’의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글쓰기를 통해 놀라운 구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글쓰기와 신체적, 정신적 건강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인정받는 제임스 페니베이커에 따르면 감정적 글쓰기(전문 연구 분야에서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라고 부른다.)는 사람들의 수면 습관, 일의 효율, 대인 관계(사회생활)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감정적 글쓰기에 관한 연구와 효과에 관한 내용은 제임스 W. 페니베이커·존 F. 에반스 씀, 이봉희 옮김(2017), 《표현적 글쓰기》, 엑스북스, 16~29쪽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페니베니커가 최초로 글쓰기의 힘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시작하면서 내세운 가설은 다음과 같았다.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중요한 문제들(심리적 외상, 감정적 격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1980년대 중반 50명 가까운 대학 신입생들이 첫 번째 글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연속 4일 동안 하루에 15분씩 글쓰기를 해야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글을 쓰기 전에 동전을 던져 심리적 외상이나 감정적인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인지, 피상적이거나 무감정적인 주제에 대해 쓸 것인지를 결정했다.


4일간 표현적 글쓰기를 하고 난 뒤, 페니베이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의 동의 아래 글쓰기 실험 3개월 뒤부터 1년 사이에 실험 참가자들이 의사를 방문한 횟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 표현적 글쓰기로 자신의 깊은 감정을 글로 털어 놓은 사람들은 단지 피상적인 주제에 대해 글을 쓴 집단보다 43퍼센트 적게 의사를 방문했다. 놀라운 결과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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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페니베이커가 표현적 글쓰기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이래로 표현적 글쓰기의 유익함과 효과를 밝히는 연구가 적어도 300개 이상 출판되었다. 이들 연구 결과는 이구동성으로 ‘나’의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적 글쓰기가 트라우마와 같은 심리적 외상을 치유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가령 표현적 글쓰기는 면역 기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고 의학적 건강 표지들을 나타내 준다. 천식 환자와 관절염 환자들은 감정적 글쓰기를 통해 심폐기능과 관절 유연성이 향상되었다. 에이즈 환자는 백혈구가 늘어났고, 과민성대장증후군 환자들은 발병도가 현저하게 낮아졌다. 암 환자들에게는 전반적인 체력 향상, 통증 감소, 수면 질 향상 등의 효과가 있었다.


감정적 글쓰기를 하는 동안 스트레스는 즉각적으로 줄어든다. 이는 안면 근육 긴장 완화와 손의 발한(發汗) 정도 감소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글쓰기를 하고 난 뒤에는 즉시 혈압과 심장박동수가 떨어진다.


감정적인 글쓰기를 하고 나면 심리적으로 복합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단기적으로는 극심한 슬픔에 빠지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등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감정적 글쓰기를 했을 경우 그 전보다 더 행복했고, 부정적인 감정을 덜 느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감정적인 글쓰기는 실제적인 삶의 행동 양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학교나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할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사회생활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도 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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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말하면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이나 감정적 격변이 감정적 글쓰기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심리적 외상이나 감정적 격변은 아주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생기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트라우마는 전쟁, 자연재해, 강간 등 특수 상황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서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때문에 정서적인 충격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내보이는 표정이나 동작이나 눈빛이 때로 우리 가슴을 찌르는 비수의 근원이 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의 시공간에서 마주치는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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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더욱 그렇다. 관료주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행정 파이프라인의 말단 하수구 같은 공간인 학교는 교사와 학생에게 일상적으로 불안과 공포의 심리를 안겨 준다. 교사는 늘 자신이 시스템과 파이프라인의 상층부에 있는 익명의 ‘그들’이 만든 교육과정과 규정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돌아볼 것을 강요당한다. 학생은 자신이 학교와 교사가 정의하는 ‘착하고 온순한 학생’의 틀에 맞는지 끝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교사는 학생들 앞에서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을 감싸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더 크고 짙은 불안과 공포가 찾아온다. 어떤 교사는 언제든 한두 마디 말로 학생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아픔을 안겨 줄 수 있다. 학생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교사의 언어는 그 자체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교사들은 교무실이나 교실에서 ‘나’의 감정과 생각을 얼마나 진실하게 표현하는가. ‘나’를 외면하거나 찾지 못하는 교사가 ‘너’(학생)를 진실하게 마주보는 지혜와 능력을 어떻게 갖출 수 있겠는가. 그러니 교사들 각자가 ‘나’에게 충실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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