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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y 22. 2019

덧셈의 ‘우리’, 뺄셈의 ‘우리’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3)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


나는 우리나라 학교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금기어 중 하나가 ‘나’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나’를 싫어하고 ‘우리’를 좋아한다. ‘나’는 학생과 학생 사이 관계와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사 사이 관계에 끼어들기 힘들다. 학교는 ‘나’가 아니라 ‘우리’가 더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공간이다. ‘나’와 ‘너’로 이루어진 덧셈의 ‘우리’가 아니라 ‘나’와 ‘너’가 없는 ‘우리’, 때로 ‘나’와 ‘너’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뺄셈의 ‘우리’다.


2


수년 전 한 인터넷 언론사의 ‘시민 기자’ 활동을 했다가 학교 징계 위원회에 회부된 적이 있다. 당시 징계 위원회 회의가 열린 회의장의 서늘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 앉은 징계 위원들은 시종 점잖고 차분한 태도로 대화에 임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내 말을 경청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강조하면서도 ‘우리’를 이루는 ‘사람’보다 학교 ‘조직’을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의 언어를 나 혼자만의 독백이나 소음이나 투정쯤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포함하여 학교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나들’을, ‘우리 학교’라고 불리는 거대한 ‘기계 조직’의 조그만 부품이나 복잡한 행정 기관에 달린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정의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라는 존재가 근원적으로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징계 위원이 말한, 우리가 교무실에서 오랫동안 들어 왔고, 앞으로도 듣게 될 한 마디가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그건 정 선생님 생각입니다.”


3


내가 있던 곳이 징계라는 특별한 사안을 다루는 공간이어서 그렇게 낯선 느낌을 받았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학교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매우 힘들다.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과 관계를 맺거나 일상의 삶 대부분을 보내는 교무실에서 ‘나’보다 ‘우리’를 더 자주 이야기한다. 교무실의 김이박최정 선생님들은 대체로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전지적인 절대자의 시점이나 객관적이라는 1인칭,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선호한다. 그들은 실제 ‘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을 빌려 ‘우리’ 생각을 전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나’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두려워한다.


교사는 학교에서 다른 교사들과 떨어져 각자 고립된 존재처럼 살아간다. 교무실의 책상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어서 교사들은 마치 바다 위에 드문드문 떠 있는 ‘섬’(사회학자 엄기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쓴 비유)처럼 보인다. 온종일 컴퓨터를 보고 앉아 있는 교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피시방’(임정훈 교사가 《학교의 품격》에서 쓴 비유) 사용자가 된다.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는 교사는 ‘달걀 상자’(미국 교육학자 댄 로티가 《미국의 교직 사회》에서 사용한 비유) 같은 공간에서 홀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4


무슨 말인가. 당신은 교무실의 김이박최정 선생님들이 사적인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르는가. 맞다. 나는 가끔 교무실에서 들리는 사적인 이야기들의 주제 목록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목록이 엑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다면 목록 표의 상위 공간에 방학 중에 다녀 온 국외 여행 기행기, 지난 학기 다른 학교로 옮겨 간 모모 교사 이야기, 며칠 전 인터넷에서 산 의복 품평기, 공부 잘하는 자녀에 대한 비법 교육론 같은 것들이 차지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내가 주장하는 ‘나’ 이야기 목록에 넣고 싶지 않다.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니다. 김 선생님이 자신이 다녀 온 국외 여행지의 숙박 서비스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그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는 실마리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면 나는 그것을 김 선생님의 1인칭 이야기로 알고 그가 하는 말에 경청하겠다. 이 선생님이, ‘모모’ 선생님을 뒷담화 하면서 교직 문화의 구조적인 한계나 교육 시스템의 문제까지 함께 언급해 준다면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당당하게 ‘나’ 이야기 목록에 올리겠다.


5


나는 교무실의 김 선생님이나 이 선생님 들이 무슨 유별난 취향이나 생활 철학을 가져서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학교 교무실을 채우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인간 관계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지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는 교사들이 나누는 사적인 대화가 인간적인 유대와 관계를 깊게 하지 않겠느냐며 지지할 수 있다. 나도 그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사적 친분 관계가 특별한 사이에서나 쓰일 법한 ‘형님, 동생’이나 ‘누나, 언니’ 같은 친족어들을 즐겨 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교무실에서 ‘형님’과 ‘동생’ 사이로 만나는 교사들은 ‘동료’ 사이로 있을 때보다 서로를 더 챙겨 주는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다. 서로 ‘언니’와 ‘동생’으로 부르며 지내는 교사들은 어느 한쪽에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발 벗고 나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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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 한때 학교에서 몇몇 선배 선생님들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뜻이 통하는 분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면서 지낼 정도로 소원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종종 그 정감 있는 호칭을 통해 더 깊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겠다는 삿된 마음도 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뜻한 관계가 형성되기는커녕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상하 관계가 더 굳어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공적 사안에 대하여 그분들과 함께 정색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즈음 ‘형님’으로 부르며 따르던 선배 교사들에게 뒤통수를 맞는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그 뒤 나는 교무실 호칭어 목록에서 ‘형님’을 삭제했다.


교무실을 포함하여 학교 공간 전체는 공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곳에서 사적인 친연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광경은 별로 보기 좋지 않다. 우리는 일부러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 존중감과 친밀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나는 ‘형님’과 ‘동생’ 사이로 맺어진 관계망 속에서 ‘좋은 게 좋다’ 식의 맹목적인 긍정주의가 쉽게 퍼진다고 생각한다. 비판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때로 교사가 지성인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를 잃어 버릴 수도 있다.


7


나는 우리나라 교무실의 강력한 언어 문화 중 하나로 사담 문화를 꼽는다. 사담 문화를 유지하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사담 주체인 교사들의 동기와 의지, 사담이 가져오는 현실적인 효용성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여기에 ‘형님’과 ‘동생’, ‘언니’와 ‘누나’처럼 비공식적인 친연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어들이 끼어들어 사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진정한 ‘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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