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Apr 28. 2019

‘나’ 글쓰기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9)

1


2007년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에 입학해 1년 동안 기숙사에서 다양한 전공을 선택한 선후배들과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2000년 3월 교직에 들어서면서 휴학을 했다가 1년만인 2001년에 복학하였다. 그해 나는 학교가 있는 전라북도 군산과 대학원이 있는 경기도 성남의 판교 사이를 1주일에 한두 번씩 오갔다. 학교에 야간제로 개설된 정보처리학과로 인사 이동을 한 덕분이었다. 정보처리학과에서는 오후 2시에 일정을 시작하였다.


학위논문을 써서 심사를 통과해야 가능한 ‘졸업’은 어렵더라도 학점 이수 조건만 갖추면 되는 ‘수료’를 최소한 획득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료에 필요한 학점을 2년여만에 모두 취득하였다. 학점 이수를 완료했으니 대학원 수료 요건을 기본적으로 갖춘 셈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없던 마음이 생겼다. 학점을 이수하면서 오간 시간이 아까웠고, 그렇게 다니면서 공부한 결과를 어떤 식으로든 매조지고 싶었다. 학위논문을 쓰기로 했다. 주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매달린 지 4년여만에 박사학위논문 원고를 탈고하였다. 2007년 2월이었다.


2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내 글쓰기는 거의 백 퍼센트 논문 쓰기에 집중해 있었다. 내 말을 불쾌하게 여기는 분들이 분명 계시리라 보는데, 나는 논문 쓰기가 꽤 용이한 글쓰기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주제와 논점이 분명하게 정해지면 논문 틀(구조) 속에 상투적인(?) 문장들을 채워 넣으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논문체라고 불릴 만한 독특한 문체로 쓰인 글들을 적지 않게 읽어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내 글쓰기 감각을 통제하는 뇌세포마다 논문체가 가로새겨져 있었다. 나는 박사논문을 탈고하고 3년여를 앞뒤로 한 시점에 논문 쓰기에 푹 빠진 채 시간을 보냈다. 어느 해인가에는 전공 학회지에 논문 4편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나는 논문을 작성하면서 일종의 관용적인 형식으로 굳어져 있는 첫 문장을 쓰는 쓰는 재미가 좋았다. 이런 형식이었다. “본고는(이 논문은) ~하는 것이 목적이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고’와 같은 고풍스러워 보이는 한자어나 ‘고찰’이나 ‘목적’ 같은 관념어가 주는 어감이 묘하고 유별스러웠다.


3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습고 부끄럽다. 나는 그때 보통 사람과 다른 글을 쓴다는 식의 지적 허세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본고’가 주어 자리에 들어가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글 쓰는 목적을 정하는 이는 글 쓰는 주체인 1인칭 대명사 ‘나’가 아닌가. ‘본고’라는 건조한 한자어는 ‘이 논문’ 같은 평이한 표현으로 써야 한결 자연스럽다. 내게  각별한 어감을 선사한 예의 문장은 기실 이렇게 바꾸어 써야 한다. “나는 이 논문을 ~하기 위해 썼다.”


논문 작성자들은 논문 쓰기에서 관행적으로 통용되는 금기에 유의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인칭 대명사 ‘나’를 문장 표면에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박사논문 초고를 완성한 뒤, 대학원 석사 과정 논문 쓰기를 지도해 주신 모교 교수님께 그것을 가져다 보여 드렸다. 며칠 뒤 초고를 받아 보니, 예를 들어 “문체는 ~라고 본다”와 같은 문장의 ‘본다’에 모두 빨간색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본다’가 문장의 객관성을 해칠 수 있으니 다른 서술어로 바꾸거나 문장 형식을 달리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서술어 ‘본다’와 연결되는 생략된 주어 ‘나’를 떠올리면서 그것을 배제해야 글의 객관성을 살릴 수 있다는 원칙 같은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4


논문처럼 객관성이나 사실성을 강조하는 글에서는 문면에 등장하는 ‘나’가 객관성이나 사실성을 해치는 제일 주범처럼 취급된다. 취재에서 얻은 사실을 바탕으로 보도되는 신문 기사문에서는 이러한 점이 더 강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객관성과 사실성의 미명 아래 ‘나’가 모조리 생략되어 있다. 이는 사실 보도 위주의 일반 기사나 글쓴이(기자)의 의견이 덧붙는 분석 기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나’를 금기시하는 기사문 작성 원칙에 따라, “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3차 정상회담에서 만날 것으로 예측한다.” 같이 써야 할 문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3차 정상회담에서 만날 것으로 예측된다.” 같은 어색한 피동형 문장이 되어 신문지면에 인쇄된다. 피동문을 쓰면 문장의 주체가 모호하게 돼버린다. 어떤 사안의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가리기 힘들거나, 책임을 따지는 일을 회피하고 싶을 때 피동문을 쓰는 경향이 강하다.


5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책에서 나, 즉 일인칭 대명사는 생략하지만 이 책에서는 생략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면에서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이 결국은 언제나 일인칭이라는 것을 흔히 잊어버린다. 만약 나 자신에 대해서만큼 내가 잘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경험이 부족한 탓에 나라는 주제로 한정되게 되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씀, 강승영 옮김(2011), 《월든》, 은행나무, 16쪽.


소로가 특별하게 언급하는 “자기중심적”인 글쓰기는 ‘나’가 문장의 전면에 등장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따른 서술 방식이다. 이는 주인공이기도 한 서술자 ‘나’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소로가 강조한 시점 이야기가 단지 서술 방식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소로는 이어지는 문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중국인이나 하와이 섬의 원주민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 뉴잉글랜에 사는 여러분들에 관한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씀, 강승영 옮김(2011), 《월든》, 은행나무, 16쪽.


6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린다. 마치 현실에 실존하는 ‘나’가 따로 있고, 글을 쓰는 ‘나’가 따로 있다는 듯이 글을 쓴다. 그러나 글은 ‘나’가 쓰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 ‘나’의 시선과 생각의 그물 속으로 들어 온 것에 기대 글을 쓴다. ‘나’가 사라지고 없거나 ‘나’를 숨기는 글은 글쓴이가 그 자신을 부정하는 글이다.


많은 문장가들이 글을 쓸 때 피하거나 없애야 할 가장 큰 적이 주관성이나 된다는 듯이 글에서 ‘나’를 빼라고 조언한다. 그들은 글에서 ‘나’를 빼거나 숨기면 객관성이 자연스럽게 살아날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나’ 없이 쓰인 문장이 어떻게 글의 객관성을 얻게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문장은 주관적인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돈다.”라는 자명한 진실을 말하고 있는 듯한 문장도 엄밀히 따지면 “나는 ‘지구는 돈다’는 명제를 말한다.”나 “나는 ‘지구는 돈다’고 생각한다.”라는, 주관적인 ‘나’ 주어를 함의한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같은 이른바 3인칭 시점의 문장도 “(서술자인) 나는 ‘새벽에 비가 내렸다’고 진술한다.”처럼 1인칭 시점이 최초의 출발점에 있다.


7


나는 우리가 글을 쓸 때 되도록 ‘나’를 분명히 밝히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글쓰기를 “‘나’ 글쓰기”라고 부르. ‘나’ 글쓰기는 글의 전체적인 시점이나 서술 주체, 문장의 주어 형식을 나타내는 대명사 표현 같은 형식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글에서 다루는 사안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글쓴이의 철학, 관점, 서술 기조와도 관련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나’의 이야기를 ‘나’의 목소리로 전하는 것과 제3자의 것처럼 보이는 목소리로 전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나’가 직접 말을 하므로 글쓴이가 진실에 근접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또한 진실과 거리가 먼 것, 책임을 지기 어려운 말을 함부로 내놓기 힘들어진다.


후자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나는 권력의 감시와 통제, 이에 따라 생존과 생계 도모를 위한 자기 검열의 심리 기제가 통용되었던 군부 독재 시대의 글쓰기를 사례로 들고 싶다. 예컨대 “(군부 독재 체제의 검열 시스템이 작동하던-글쓴이 주) 언론 무덤에서 활짝 핀 피동형 표현”김지영(2011), 《피동형 기자들》, 효형출판, 28쪽.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기자들은 ‘나’가 사라진 피동형 문장과 익명에 기댄 간접인용문을 쓰면서 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를 알게 모르게 보여 주었다.


‘나’의 이야기를 ‘나’의 목소리로 전할 때 글에 대한 책임감이 자연스럽게 커진다. ‘나’의 의견이 ‘나’의 의견임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는 문장을 읽으며 또 다른 ‘나’(독자)는 글쓴이에게 직접 말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 글쓰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진실하게 말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작가의 이전글 “교사는 지성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