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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Nov 28. 2019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1


며칠 전 유쾌하지 않은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꿈에서 어느 산비탈을 걷고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무슨 기괴한 굿판처럼 보이는 일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잠시 뒤 나와 잘 아는, 몇 년 전 죽은 이가 보였다. 그는 내가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그 전부터 서서히 자각몽 상태에 빠져 있던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미묘하게 그에 대한 죄책감이, 또는 미안함이 느껴졌다. 그곳을 더 빨리 빠져나와야겠다고 여기며 발걸음을 서두르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온몸이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을 때처럼 욱신거렸다. 기운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거실에서 아들과 잠을 잤는데, 그 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아내와 막둥이가 자는 안방으로 갔다. 아내를 흔들어 깨워 ‘악몽을 꾸었네’ 하고 말하며 침대에 누웠다. 아내가 나를 조용히 껴안아 주었다. 나는 곧 포근히 잠에 빠져들었다.


2


요며칠간 크고 작은 일들이 멈추지 않고 발생했다. 학생들 간 사소한 장난과 다툼,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갈등 문제 모두가 내 귀에 전해졌다. 한 달여 전 안전인성인권부장이 병가로 학교를 쉬게 되면서 두 사람이 나누어 맡았던 학생선도와 학교폭력과 교권침해와 관련된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사안들의 실무 과정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전해 듣거나, 대화 상대방인 학생이나 교사를 응대하면서 나도 모르게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도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을 테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매우 불편하고 기분 나쁜 통증이 등과 허리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방바닥에 뻗을 때가 많았다. 며칠 전의 악몽은 그렇게 서서히 소진되어 가던 내 몸이 무심결에 보내 온 메시지였을 것이다.


3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일하는 사이사이 책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했다. 하루에 한 쪽이라도 읽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게 하자며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것이 언제든 스러질 수 있는 내 몸과 마음을 마지막까지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나는 일이 일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내는 일은, 꼭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해 놓으면 괜찮은 것들인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그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처리하다가 저 일을 다시 정리한다. 어찌 보면 바람직스러운 현상이다. 학교교육이라는 공적 책무를 지는 교사들이 성실하고 꼼꼼하게 일을 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증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에 묶여 지내다 보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공부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덜 갖게 된다. 실상 그런 책 읽기, 글쓰기, 공부하기, 생각하기, 성찰하기야말로 교육자가 가장 귀하게 여겨 자주 해야 할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자 교사가 해야 할 일로서 가장 일다운 일이지 않은가.


4


교사가 학교에서 하는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까닭은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점을 위할 때라야만 일이 일다워진다고 믿는다. 그밖에 하게 되는 모든 일은 일 같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일은 일 같지 않은 일답게 처리하자.


누가 한 말터럼, 하마터면 열심히 일하면서 살 뻔했다. 나는 며칠 전 피곤에 절은 내 몸이 보낸 악몽의 메시지가 얄팍하고 궁근 생활의 시간을 돌아보라는 엄중한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게으른 교사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더 게으르고 나태한 교사로 지내겠다. 일 같지 않은 일은 더욱 대충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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